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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dez-vous

왱

Rendez-vous

-별들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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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흐르지 않을 것만 같던 모래알 속의 별 하나. 누구든지 보는 사람이면 모두들 아름다움에 넋을 놓게 된다고 하여 이름마저도 찬란한 이브. 살짝 내려앉아 나풀거리는 이브의 검은 머리도, 밤하늘 같이 어여쁜 두 눈동자도, 유연하면서도 날카롭게 움직이는 그이의 움직임도. 모두를 홀리게 하긴 충분했으니 어찌 이브가 주는 사과를 베어 먹지 않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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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큰 종이 세 번 울리면 두 손에 안기에도 벅차 보이는 방대한 신문을 이리저리 나눠주는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이라기엔 키가 꽤 컸고 어른이라기엔 너무나 마른 그였지만 이리저리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잘도 빠져나간다.

 

 

    “오늘 신문이에요! 어서 가져가세요!”

 

 

    꽤나 어수룩한 프랑스 발음. 조금 엇나간 악센트와 문장도 매끄럽지는 않은 한 마디 정도였지만 쌀쌀한 날씨에 붉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이를 개의치 않는 듯 오밀조밀 움직였다. 헌 장갑을 낀 탓에 조금 벌어진 구멍 사이로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들이 겨우 신문들을 잡고 있었고 그의 허리를 비틀거리게 하는 두둑한 가죽 가방은 그의 몸집의 반을 차지할 정도였으니. 멀리서 봐도 흰 와이셔츠와 검은 멜빵바지가 눈에 띄었다.

 

 

    “오늘도 부지런하구나. 신문 2부만 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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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프랑이에요, 쟝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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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이렇게 일찍 나온 걸 보니 오늘 신문의 첫 면은 보나마나 이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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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아요! 이브가 올해 2년 연속 최연소의 나이로 에를리히 발레단의 *프리모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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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모 (발레리노):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노에게 붙여지는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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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참. 너같이 이브를 좋아하는 녀석은 처음 본다. 물론 이브가 춤추는 게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우리가 뭘 알겠냐마는. 넌 왜 그렇게 이브를 좋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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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브가 춤추는 걸 보셨으면 아마 저처럼 빠졌을 거에요. 우아한 점프에다 바로 이어지는 턴까지 정말 이브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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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이브를 좋아하면 발레단 시험이라도 봐보지 그러니. 안 그래도 근처에 있는 비슈 발레단이 새롭게 무용수를 뽑는 다던데 산이 너는 조금만 전문적으로 배워도 잘할 것 같단 말이지.”

 

    “저는 이렇게 신문으로나마 보는 걸로도 만족해요. 그리고 제 나이 때부터 발레를 시작하기엔 늦은 거 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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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워서 그런다, 아까워서. 네가 뭐가 아쉬워서 신문이나 돌리고 있어. 하여간 산이 네가 고생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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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써주셔서 매번 감사해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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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스런 시선도 잠시 손에 있는 시계를 흘긋 보던 쟝이 자리를 벗어나서야 산이 참아왔던 서리 가득한 숨을 내뱉는다. 잠시 뿌옇게 흐려진 자신의 시야도 잠깐, 굳게 서있던 다리를 다시 움직이며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다. 헤진 신발의 밑창이 닳아 오늘은 꼭 꿰매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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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많이 사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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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이브가 첫 면이라서 그렇겠지. 이브의 소식이라면 파리 온 동네가 들썩이니까. 산이 조금 구겨진 신문의 첫 면을 펼치자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인생에서 한 번 얻기도 힘들다는 프리모 호칭을 이브는 최연소의 나이에 벌써 2번째였다. 주근깨가 쫌쫌따리 있는 볼과 목, 툭 튀어나온 광대, 또래들보다 힘도 약해 공장에서도 일을 못 받는 산과 달리 깨끗한 피부와 동글동글한 얼굴. 날씬하지만 잘 잡혀 있는 근육의 이브는 산의 별이었다. 쟝 아저씨의 말이 문득 떠오르면 산은 매일 밤을 곱씹어본다. 2년 전 처음으로 보았던 이브의 데뷔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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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쟁쟁하던 발레리노들을 다 제치고 솔로 무대를 장식한 흰 이브는 산과 같은 나라 출신이랬다. 신문이며 방송사며 모든 주목을 다 받은 에를리히 발레단의 신예 발레 리노는 파리의 거리에도, 산의 마음에도 태풍을 가져와 헤집어놓았으니까. 산이 이브의 공연을 보게 된 건 순전한 우연과 운의 합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샤를이 같이 가자며 표를 준 날이 산의 인생도 같이 바꿔놓았으니. 에를리히 발레단은 발레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산도 알고 있을 만큼 역사 깊은 발레단이었다. 세계 발레 대회를 휩쓰는 이들 대부분이 에를리히에 속해있을 정도였고 에를리히 발레단의 *코르 드 발레가 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어서.

 

    *코르 드 발레: 발레단에서 솔로를 추지 않고 집단으로 춤을 추는 무용수들.

 

    그런 에를리히 발레단이 내놓은 신예, 그것도 2년 동안 프리모를 꿰차고 있던 발레 리노를 제치고 선보인 이브는 국적이 프랑스도, 유럽도 아닌 곳이란 소식이 퍼지면서 득달같은 관심이 쏟아졌다. 산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만난 한국 사람이라곤 티비 속 한국을 홍보하는 짧은 광고에서나 볼까 말까 였으니. 들어가는 내내 열광적으로 떠드는 샤를의 말에 집중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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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이브 국적이 한국이라잖아 한국!”

 

 

    샤를이 외치는 한국의 발음인 코레가 조금 우습게 들리기도 했지만 산에게 딱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조금 보고 흥미 잃을 발레 아니던가. 발레의 발자도 모르는 산이 아는 거라고는 무대에서 혼자 나올 발레리노가 그 이브라는 것 외엔 무지했다. 파리의 낮보다 훨씬 쨍하게 산의 눈을 찔러오는 조명에 뻑뻑해지는 눈도 잠시 화려한 1막이 문을 열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이리저리 오가니는 무용수들. 아프지도 않은 지 잘도 발을 들고 점프를 한다. 아마 좀 더 어린 나이의 산이었다면 저 황홀하게 느껴질 공연을 보고 입을 벌리고야 있겠지만 신문 돌리는 소년에게, 뭐가 그리 크게 와 닿겠나. 돈이 되는 것도, 흥미 있는 것도 아닌 발레는 산이 쟝에게 받았던 4프랑의 가치보다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끈질기게 보는 것도 잠시, 한참이나 계속되는 공연에 눈이라도 붙여야 하나 싶어서 고개를 숙이면 제 어깨를 격하게 흔드는 샤를의 손길이었다.

 

 

    “산! 산! 2막의 하이라이트! 이브의 독무야!”

 

 

    입은 저의 귀에다 열심히 조잘거리면서 눈은 오로지 무대를 향하는 그녀에 마지못해 반쯤 감긴 눈을 앞으로 가져다 댔을까. 아주 잠시 동안 산은 1초도 채 안 될 시간동안 이브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서둘러 숙였던 허리를 바투잡고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까지 훅훅 걷어내면 산의 눈에 별이 반짝했다. 나풀거리는 흰 상의는 이브가 움직일 때마다 마르면서도 탄탄해 보이는 이브의 배를 보여주는 반면 이브의 다리에 조금씩 달라붙는 바지는 그의 움직임을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가지각색의 화려한 머리들 사이 돋보이는 칠흑의 머리 이브는 작은 점프를 사뿐히 해내다가 산의 고개가 높게 올라간 순간, 가장 높고 아름답게 지상을 뜨더니 날개를 단 듯이 기교를 뽐낸다. 아아, 산의 눈앞에 탐스럽게 농익은 사과가 놓인 기분이었다. 이브에게 홀린 건 그뿐만이 아니었는지 이브의 독무가 끝나도 끊이지 않는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그를 대신했고 산은 공연장을 나와 입에서 새는 김을 보고나서야 눈의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잔뜩 호들갑을 떠는 샤를을 뒤로 천천히 공연장을 나와 어둑해진 하늘을 내내 바라보던 산이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도 지었다. 저 빛나는 별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는 기대감과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거리감에 드는 회의감이 이리저리 섞여 전해지듯이. 산에게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을 만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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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산이 이브의 열렬한 팬이 된 건. 산은 제 밥 한 끼, 잠자는 시간 줄여가며 낮에는 신문을 팔러 다녔고 저녁이 되면 이브가 나온 신문을 돌려보거나 쟝이 선물해준 발레 입문서를 보며 이브가 했었을 동작을 따라 해보기도 했다. 그런 산이 아주 기초적인 1번부터 5번까지의 발동작을 터득하는 데만 1주가 꼬박 걸렸을 정도로 산 자신이 약하단 걸 알고 있었다. 유연성도 없고, 발레를 하기엔 마른 산이 쟝에게 입문서를 받아들고 좋아할 때만 해도 쟝의 이런저런 잔소리를 들은 건 당연했다.

 

 

    “네가 좋아하니 사주는 건 문제가 없는데, 괜찮겠어?”

 

    “이걸로도 너무 감사해요, 아저씨.”

 

 

    산이 저녁마다 입문서부터 기본편까지의 책들을 보는 동안 이브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치솟았고 산이 보았던 이브의 모습은 마지막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나마 간간히 전해 듣는 소식은 산이 매일 돌리는 신문의 사진과 글들뿐이었지만 괜찮았다. 신고 연습할 토슈즈가 없어 거리에서 신고 다니는 신발이 헤져도,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해 상처가 아물 날 없는 산의 발도. 산의 유일한 보금자리에서의 휘청 이는 촛불들은 밤새도록 산을 비춰줄 것이었기에.

 

    산은 이상적인 어른인 쟝도 혀를 내두를 만큼 긍정적인 이였다. 물론 현실을 아는 것도 맞고, 일에 열정적인 모습도 가득했지만 발레에 대한 지식이 아주 없던 산이 이브를 본 후 2년 뒤인 지금은 그 누구보다 발레에 진심이 되어버린 듯 했으니까. 발 하나 뻗는 게 아플 거라며 산을 이리저리 타이른 쟝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처럼 산은 수시로 상처 가득한 저의 발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저씨, 이것 좀 봐요. 저 이제 아쌈블레도 잘해요.”

 

 

    잘게 통통 튀는 산의 두 발이 쟝에게 헛웃음을 짓게도 만들었다. 발레를 모르는 쟝이 보아도 산의 몸짓은 꽤나 날렵했으니까. 허투루 따라한 건 아니었는지 처음 만났을 때 살도 많이 없어보이던 산의 팔과 다리에는 근육이 이리저리 붙은 듯 했고 쟝의 어깨춤에 오던 산의 머리는 목의 중간까지 왔다. 정작 산 본인은 키가 큰 지도, 근육이 붙은 지도 모른 채 기뻐라 다리를 움직이는 듯 했지만 쟝은 꼭 4프랑씩을 산의 손에 쥐어주며 별 볼일 없는 신문까지도 챙겨갔다. 하나는 볼 용도이고 하나는 친구에게 줄 거라며 같은 대답을 하는 쟝이었지만 애초에 신문을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쟝은 그저 미래의 빛날 지도 모르는 산에게 주는 소정의 돈이라 생각했다. 산의 발레를 본 사람이면 누구든지 이 정도 돈은 낼 거라 여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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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발레를 배운 적 있니?”

 

 

    쟝에게 여느 날과 같이 새로이 연습한 동작을 보여주던 산이었는데, 고급스런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말을 걸었다. 하나같이 산이 평생을 신문을 팔며 벌어도 못 살 그런 명품을 입고선. 흠칫 놀란 산을 다독인 건 역시나 쟝의 몫이었지만 쟝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산의 아마추어스러운 발레에 누군가가 관심을 가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상대가 아무나 는 아닌 걸로 보였을 정도이니, 산을 서둘러 끌어당겨 뒤로 보낼 뿐이었다.

 

 

    “오, 이런 제가 놀라게 해드린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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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일 이십니까?”

 

 

    산이 프랑스에 머물고 있다 해도 생계유지를 위한 말만 튼 터라 배운 말들도 쟝에게서 나온 것들이었기에 쟝과 남자가 주고받는 대화를 따라가는 데 벅참을 느낄 뿐이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발레단, 재능이란 단어가 들려옴에도 쟝의 거친 외투 끝자락을 잡은 게 다였을까, 쟝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일이 일어난 것처럼.

 

 

    “아주 좋은 일이야, 산. 너의 발레가 독학이라는 사실을 듣고 발레단으로 데려가고 싶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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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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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조금만 전문적으로 배우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루아르 발레단이래. 들어본 적 있니?”

 

 

    발레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들어본 발레단인 루아르 발레단. 대회에 내보내거나 공연을 하기보다는 어린 무용수들을 키우는 발레단으로 유명한 곳이었고 산은 그제야 왜 저를 데려가려는지 알았다. 저가 어려 보여서겠지.

 

 

    “전 21살이에요. 생각하시는 것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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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히 산의 말에 당황한 건 맞는 듯 했지만 산을 처음 볼 때 했던 말처럼 다시금 여유 있는 미소를 띤 채였다.

 

 

    “루아르 발레단은 재능과 노력이 가득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곳이야. 같이 가보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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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의 눈이 잠시 쟝을 향했다가 휘어지는 그의 눈 덕에 또렷해진 산의 시야였다. 곧이어 환하게 웃어 보이는 산에 실없는 웃음을 지은 그가 부드러운 장갑을 낀 손을 내밀어왔다.

 

 

    “에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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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이에요. 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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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이한 이름인데. 동방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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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그곳에서 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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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하하 하고 웃어 보인 에프랑이 이내 산의 등을 살짝 툭 치더니 쟝을 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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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는 해야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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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참. 내가 뭐랬어. 넌 여기 있긴 아까운 존재랬지 않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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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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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가 되지 않아도 좋아. 최선을 다하면 된 거야. 그만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 이 거리의 쟝에게 돌아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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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뿌옇게 흐려진 것만 같은 산의 눈을 조용히 가려주는 쟝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넌 내 아들과 마찬가지였어. 다녀오렴. 다녀오겠다는 짤막한 말을 남긴 채 에프랑의 넓은 등을 따라가다 보면 커다란 기차가 보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세상에 가는 듯이.

 

 

    “여긴 외곽 지역이라 발레단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거든. 한 숨 자는 게 좋을 거야.”

 

 

    익숙하게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간 에프랑은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따뜻한 담요 한 장을 건넸다. 그러고선 두꺼운 책 하나를 펴고 읽는 듯 했고 산은 그것도 모든 게 낯선 자신을 위한 작은 배려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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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투! 강하게, 그 다음은 부드럽게. *브리제! 다시!”

    *브리제: 점프 동작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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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이 머물던 거리의 낮은 건물들과는 달리 잠깐 기차를 타고 온 사이 달라진 풍경은 산의 작은 입을 저절로 벌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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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같은 파리라도 나뉘는 법이지. 산.”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제 이름 한 마디에 빠르게 고개를 돌리면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에프랑이었고 곧이어 저에게 내미는 꽤나 묵직한 가방이 저의 짐이라는 걸 알았다.

 

 

    “거기에 입을 옷이랑 신발, 발레복까지 다 있을 거다. 머물 곳은 아마 너랑 비슷한 나이 대인 아이가 한 명 있어서 같이 방을 쓸 거고. 질문 있니?”

 

    “수업은..언제부터 시작인가요?”

 

    “언제부터 하고 싶니?”

 

    “..지금 당장이요.”

 

 

    에프랑의 환한 미소도 잠시 그의 뒤로 또 다른 그림자가 다가왔고 산이 발레단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들은 목소리의 주인 인 듯싶었다.

 

 

    “에프랑, 이 아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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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요. 살로메. 잘 가르쳐줄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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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겠네요. 전 끈기가 없는 아이는 별로라서. 에프랑이 데려온 아이라고 하니 특별히 봐주는 거에요. 시즌이 시작된 지 한참인데 이제야 들어오다니. 운도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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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모르는 거니까요. 산, 여긴 네 발레를 가르쳐줄 살로메. 살로메, 내가 데려온 산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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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살로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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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의는 발라서 좋네요. 그럼 기본기부터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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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프랑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 대. 곱게 자리 잡은 자글자글한 주름이 산의 앞에 서있는 살로메의 기품을 더해보이게 만드는 듯 했고 살로메를 따라가며 지나치게 되는 수많은 아이들이 보였다.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갔을 것 같을 만큼 어려보이는 아이부터 고난이도의 동작을 소화하며 테스트를 받고 있는 아이까지. 산은 그제야 제가 발레의 정상을 향한 한 걸음을 땐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안쪽에 위치한 작은 연습실. 살로메가 불을 켜자 깨끗하고 한 명이 연습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여기가 네 개인 연습실이 될 거다. 다른 아이들과 같이 들어왔다면 공용 연습실과 함께 수업도 같이 들었겠지만 너는 나이도 한참 많고 진도도 느리니. 우선 발레복부터 입고 나오렴.”

 

 

    뒤에 작게 위치한 탈의실까지 들어서자 산은 그제야 제가 쥐고 있는 발레복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산이 입고 있던 옷과는 재질부터 다르게 부드럽고 조금은 따뜻한 것도 같았다. 가끔씩 거리에 있다 보면 발레를 배우러 가는 남자아이들을 본 적이 있었다. 손에는 부모님이 사주신 발레복을 들고 바쁘게 달려가는 모습이 어찌나 명랑하던지. 산도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집어 던지고 같이 달려가고 싶었을 만큼. 움직이기 편할 수 있도록 흰 반팔, 검은 바지 형태의 발레복이 산을 세상에서 숨쉬게 만들었기에 산은 거울에 비친 낯선 자신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벗은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확실히 왜 에프랑이 오해했는지 알 것도 같네. 산, 몇 살이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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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살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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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이라니. 키도 좀 작고, 몸에는 최소한의 근육만 있네. 혼자 발레를 해온 게 기특할 정도인데 말이지. 산, 네가 생각하는 발레리노의 조건은 뭐라 생각하니?”

 

 

    그 순간 산의 머릿속에는 무대 위를 누비는 우영의 모습만이 생각났다.

 

 

    우영의 몸짓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날아오르는 기술들처럼 능숙하게 우영이 무대 위에서 지었던 웃음과 함께 발레에 대한 열정이 많은 그런 발레리노.

 

 

    “눈만큼은 이브를 닮았구나. 아니, 넘어설 정도인가. 그렇다 해도 지금 발레를 배우기엔 몸이 약해. 운동이랑 같이 하자. 남들에 비해 두 배로 힘들 거야. 그래도 하겠니?”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산은 깊게 파여진 보조개를 드러냈다. 어떻게든 높은 곳으로 올라가보겠다고. 떨어져봤자 똑같을 밑바닥의 파리에서 아플 것도 산에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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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디션은 어때 이브? 레오가 프리모를 뺏겨서 이번에는 단단히 벼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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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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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정도. 네 실력이라면 이번 대회도 문제는 없겠지만 네 발목은 그렇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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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아젤. 나 발레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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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너덜너덜한 발목에다 숨도 못 쉴 만큼 테이핑 하면 이번 시즌까지는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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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됐어요.”

 

    발목 보호대를 더욱 조이는 우영에 대한 안쓰러움과 보기만 해도 아파보이는 발목이 모아젤을 한숨짓게 만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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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브. 병원에서 쉬라고 했잖아. 3개월 정도만 쉬다가 다시 들어오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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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일만 지나도 굳는 게 내 발이고 몸이에요. 2년 연속 프리모를 차지한 최연소 발레리노 이브. 이게 내 위치인데 3개월을 쉬다간 떨어져버릴 거에요. 내 발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게 난 더 싫어요.”

 

    “이브..이브!”

 

    아름다움의 정점에 선 이브에게 겉은 매혹적이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간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져간다. 빈틈없이 꽉 찬 우영의 눈망울엔 더 이상 발레를 향한 열정이 아닌 그저 지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발악이 모여 만든 추악한 천사가 있다고.

 

    우영은 남몰래 매일 생각한다. 차라리 내가 납득할 만큼 더 아름답고 더 숨 막히는 발레리노가 있다면. 그럼 여기서도 그만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고작 승부욕에 눈이 멀어 제게 달려드는 짐승에겐 우영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고, 감히 이브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어리석은 이도 많지 않으니. 우영은 망가져가는 몸과 마음을 억지로라도 움직여야 했다.

 

    하루 일과 속에 있는 거라고는 연습과 내 몸을 보는 것. 발레단까지 잠깐 걸어가는 아침의 시간동안 우영은 꽤 많은 사람들을 지나치고 마주친다. 엄마, 나도 이브처럼 멋진 발레리노가 될래요! 엄마의 손을 꼬옥 잡고 자신의 사진이 담긴 신문을 내미는 어린 아이도. 여기 따끈따끈한 마들렌이 나왔어요, 달달한 브리오슈도 있답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절 알고 있다는 것처럼 가게에 잠시 멈춰선 제게 따뜻한 브리오슈를 내미는 빵집 주인도. 삶이 저보다는 즐거워 보였다.

 

    “이른 시각부터 부지런하네. 이것 좀 먹어봐.”

 

    설탕까지 찍어서 내미는 손길이 퍽이나 다정하다. 천천히 받아 들어서 크게 베어 물면 달달한 버터 향과 설탕이 씹혀 들어오는 게 또 다른 희망을 주는 듯이. 맛있네. 평소와 다르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쫒아 바게트와 밀푀유까지 한 아름에 안은 우영이 걷는 길은 따뜻했다. 빵의 온기들 덕인지 조금 전에 먹은 브리오슈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영은 꽤 오랜만에 웃음이 났다. 매일 시리도록 아팠던 발목도 잠시 사그라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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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하나 둘 하면 *푸에테! 오늘은 컨디션이 괜찮나보네.”

    *푸에테: 회전 동작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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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그럭저럭 이죠. 근데 아침부터 발레단이 좀 시끄럽던데 무슨 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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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비슷하지. 유망주들 데리고 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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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맞다. 이번에는 몇 명이나 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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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숀드에서 5명, 루아르에서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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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많네요. 저번에는 10명도 채 안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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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도 참, 이 모아젤의 안목을 무시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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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들어가 볼게요. 오늘은 좀 피곤해서.”

 

    묶었던 머리를 풀고 발레단을 나서려는 우영을 잡은 건 모아젤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 이브. 이번에 온 유망주 중에 너랑 같은 나라 출신인데 나이도 같은 애가 있더라. 발레단에 우영이 머무는 동안 같은 나라 출신의 발레 리노를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많아봤자 열 두어 살. 국적만 순 한국이지, 대다수가 프랑스에 사는 이들이었으니 평생 볼 일 없다 생각했는데. 우영의 호기심이 얼굴 모를 이에게 향했다.

 

 

    “모아젤. 그 애 이름이 뭔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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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브도 궁금하긴 한가보네. 비밀. 가는 길에 직접 물어보든지 해.”

​

        우영의 작은 발걸음이 조금 빨라지고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오늘 새로 왔다고 했으니 대 연습실에 있겠지. 가슴이 쿵쿵 뛰는 건 오랜만에 보는 한국인이라. 서둘러 달려와 보이는 대연습실 안의 돋보이는 한 사람을 봤을까 순간 처음으로 보았던 발레 공연이 생각났다. 마지막에 독무를 추는 그 해의 프리모를 보고 발레에 흥미가 있었던 그때. 우영보다 좀 더 다부진 체격이지만 유연하게 동작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예쁘다고. 왜 진작 아를리히로 넘어오지 않았지. 인상을 찌푸리는 우영 뒤로 그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모아젤의 말이었다.

 

 

    “루아르에 들어간 지 1년 가까이 됐대. 최고의 숨은 보석이었지.”

​

    “21살에 발레를 시작했다는 말이에요?”

​

    “미친 재능이지. 꼭 옛날의 너 같다. 입단 테스트도 일등일 걸. 잘하면 이번 무대에 같이 설 수도 있겠다.”

​

    “두고 보면 알겠죠.”

 

 

    매년 에를리히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와 프리모 발레 리노는 12월 한 해의 마지막에 주어진다. 발레단이 신입 무용수를 받는 시기는 단 3번. 3월, 7월, 11월. 신입 무용수들과 함께 무대를 꾸미는 공연은 4월, 8월, 12월. 그 공연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인 무용수들은 프리마와 프리모가 공연하는 가장 큰 무대에도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신입 무용수들은 보통 3월에 많이 들어오기 마련인데. 뭔 생각으로 11월에 들어온 거야. 6월쯤에만 들어왔어도 더 좋았을 텐데. 이리저리 잡생각을 하다 고개를 휘젓고 다시 안을 들여다보면 어느새 자리에 없는 그였다.

 

 

    “뭐야..어디 갔어..?”

 

    “누구 찾아요?”

 

    기척도 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 낯선 이에 뒤를 돌면 우영이 한참이나 보고 있던 이였고 주룩주룩 흐르는 땀에 무심코 저가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네었다.

 

 

    “감사합니다, 이브”

​

    “한국사람 맞나보네. 프랑스어가 좀 서툰 걸 보면.”

 

    다른 나라 사람이 들으면 넘어갔을 말들이지만 꽤나 오래 프랑스에 있던 우영은 산의 프랑스어가 낯설다는 걸 알 수 있었을까, 그래서 잠시 본심을 내비췄다.

 

    “어..아, 네!”

​

    우영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가 펴졌다. 연습실 내에서는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 같더니 얼굴 풀린 거 봐. 미친 재능이긴 하네.

 

 

    “왜 존댓말 하냐. 우리 동갑인데.”

 

    “아, 저보다 선배이시니까..제가 이브 팬이기도 하고..”

 

 

    그때의 산의 표정은 딱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려는 터지기 직전 앵두 같았다.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는 산의 행동에도 잠시 푸하하 웃어버린 우영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

​

    “알다시피 이브.”

   

    “최산입니다, 최산이요.”

​

    “반말해, 그냥. 나 친구도 없어.”

​

    “아, 응! 이브 잘 부탁해.”

​

    “우영. 정우영이야. 앞으로 이름 그렇게 불러.”

​

    “정우영..이름 예쁘다.”

 

 

    고작 발레 한 번 본 애가 뭐가 그리 좋다고 본명까지 알려줬는지는 우영도 잘 모른다. 그냥, 그냥 알려주고 싶었겠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꽉 잡은 산의 손도 혼란스런 우영의 마음을 달래듯이 브리오슈처럼 참 따뜻했다.

 

 

 

​

 

    공연 날까지 이 주. 프리모 선발까지는 한 달 조금 안 되는 시간. 정신없이 바빴을 우영의 일상에는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아침 일찍 나서는 우영을 위해 우영이 즐겨먹는 마들렌 한 상자와 딸기 스무디를 언제나 가져다주는 산이었고 우영은 그런 산과 같이 연습했다. 드디어 이브에게도 친구가 생겼다는 모아젤의 짓궂은 장난에도 얄궂게 웃어 보인 우영에 산도 항상 따라 웃었다.

​

​

    “산아, 거기서 다리 좀 더 벌려야 해. 그래야 점프가 더 예뻐.”

​

    “아아, 그렇지. 영아, 이번에 하는 무대에서 잘하면 너랑 같이 무대 설 수 있지?”

​

    “일단 이번에 하는 무대에 들어갈 생각을 해야지, 산아.”

​

​

    다시 컴컴한 밤이 되어 돌아갈 때는 산은 발레단 근처 기숙사, 우영은 발레단에서 조금 떨어진 집이었지만 우영의 집까지 데려다주다가 같이 자고 나오는 게 태반이었다. 가끔 쉬는 날이 있을 때는 새벽까지 서로의 발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

​

    “우영아, 네가 내 꿈이자 빛이었어. 발레를 시작하게 된 것도, 여기 들어오고 싶었던 것도 다 네가 시작이야.”

​

    “내 시작은 네가 아닌데도 괜찮아?”

​

    언제나 산은 우영에게 올곧은 대답만을 해주었다.

​

    “대신에 영이 너의 끝은 내가 가져갈게. 내 시작과 끝은 모두 너겠지만 너는 끝이어도 충분해.”

​

    “뭐야, 그게.”

 

 

    실없이 웃어 보인 우영이 이불 속을 파고들어 단단한 산의 가슴팍으로 머리를 기댔다.

 

 

    “산아, 넌 발레를 그만두면 뭐하고 싶어?”

 

    “너는 하고 싶은 거 있어?”

 

    “네가 사다주는 브리오슈. 그거 만들고 싶어. 아, 산이 너 고기 좋아하잖아, 샤토브리앙이라고 엄청 맛있는 스테이크인데…….”

 

    서서히 망가지는 발음과 감기는 우영의 눈꺼풀에도 응, 응 하고 가만히 듣고 있던 산이 색색하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저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우영의 위에 둘러주었다.

 

    “아프지만 않으면 돼. 잘 자 영아.”

 

 

 

 

 

​

 

    “최 산, 할 수 있지? 이번 공연 꼭 해야 돼.”

​

    “응, 알았어.”

​

​

    소수의 인원으로만 이뤄지는 테스트는 아무리 이브라도 참관하기는 무리였기에 연습 광으로 소문난 우영이 연습도 미루고 다리를 덜덜 떨고 있으면 테스트를 위해 들어갔던 신입 무용수들이 줄줄이 나왔다. 극소수만 할 수 있는 공연이기에 밝은 얼굴보다는 눈물까지 흘리는 무용수들이 많았을까, 마지막으로 나온 산이 떨리는 우영의 동공을 마주했다.

​

​

    “왜, 왜 그렇게 쳐다봐. 안 됐어? 진짜로?”

​

    “영아…….”

​

    “아냐, 괜찮아. 내년 4월 달까지 준비를 해서…….그러니까…….”

​

    “나 공연 들어간대, 영아.”

​

​

    횡설수설하며 쳐다보는 우영을 잔뜩 안아든 산이었다. 나, 공연 할 수 있대, 영아. 씨이, 쫄렸잖아, 바보야……. 꽤나 오랫동안 산을 안고 있던 우영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저 다행이라고.

 

 

 

​

 

    “그렇게 떨려?”

​

    “아, 그럼 당연히 떨리지, 이 바보야. 여기서 떨어지면 너랑 나 무대 같이 못해.”

   

    “난 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은데.”

​

    “시끄러, 멍청아. 네가 안되는 게 문제인거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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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둘 다 참가 하게 된 거 아니면 말 걸지 마, 떨리니까.”

​

    “영아, 눈…….떠도 돼.”

​

    “또 장난치려 그러지. 안 속아.”

 

 

    내가 속을 줄 아나 라며 눈을 꾸욱 감은 우영에 피식 웃으며 눈에 붙어있는 손을 조심히 떼 주는 산이었고 커다랗게 붙어있는 종이에 써져있는 두 글자를 보고나서야 주저앉은 우영이었다.

 

 

    “드디어 같은 무대네. 최 산, 같이 서니까 기분이 어때.”

​

    “잘 모르겠어. 몇 년을 그것만 보고 달려왔는데, 막상 이루어지니까 낯설기도 하고 그러네.”

​

    “뭐,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근데 넌 이름 새로 안 지어? 난 오자마자 이브로 바꿨는데.”

​

    “좋은 이름 있어?”

 

 

    해맑은 산의 얼굴을 보자니 우영은 그저 꺄르르 웃어댔다.

​

​

    “이름 다시 짓자니 너무 안 어울려. 넌 그냥 산이가 최고다. 산.”

​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

    “그럼 이제 연습하자. 최고 발레단에 들어왔으면 프리모까지 도전해야지. 안 봐준다.”

​

    “영광입니다, 이브.”

​

​

    우영의 마음속에도 예쁜 희망이, 우영의 삶에도 낙이 하나 찾아오는 순간인 것 같았다. 이런 순간에 이런 방식으로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우영은 진짜 행복했다고 생각은 많이 했으니까.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근육 손상이 많이 됐어요. 자칫하다간 다리 못써요.”

 

    간간히 넘겨왔던 통증이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서있기조차, 말하기조차 너무 가쁘고 힘겨워서 피했던 고통을 받으니 오히려 속이 후련해진 건 나의 과오겠지. 마지막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2주도 채 남지 않았는데. 공연을 하기만 하면 프리모 발레 리노는 올해도 이브의 것이 될 텐데 흰 붕대로 가득한 자신의 다리를 보며 처음으로 굳은 표정을 보여주는 산을 보자마자 괜스레 눈물이 나왔다. 넌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니냐, 산아. 위로 올라오는 게 너의 꿈이라면서.

 

 

    “왜 그리 아파. 다친 건 난데. 왜 네가 더 울어. 산아, 좋아해야지.”

​

    “정우영.”

 

 

    파들거리는 산의 입술이 애처롭게 방향을 잃어 저만을 부른다.

 

 

    “아프면 말해야지. 발이 이렇게 되면 쉬겠다고 해야지. 왜, 아픈 걸 계속하려 해.”

​

​

    도대체 왜. 산의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와 눈이 우영을 가득 품어왔다.

 

 

    “나도, 쉬고 싶었어. 발레 그만하고 싶은데, 나 너무 아파 산아. 처음 시작하던 거랑 달리 이제는 발레가 재밌는 지도 모르겠고 사람들 기대도…….”

​

    “괜찮아, 괜찮아. 우영아.”

 

 

    뚝뚝 끊겨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는 말에도 우영은 저보다는 시선을, 발레를 걱정하는데. 산이 우영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그저 토닥거렸다. 네가 그만하면 나도 그만할게, 그러니까 울지 마.

 

 

    “산아아.”

​

    “응.”

​

    “발레, 그만할래.”

​

    “응.”

​

    “대신, 산이 넌 계속해줘. 내 끝이 되어주겠다며. 내가 네 끝 이라며.”

​

    “응. 해줄게. 꼭 할 게. 이브.”

 

 

    늘 들어왔던 자신의 이름 이브 한 단어가 그리 달콤한 건지도 우영은 처음 알았을까, 산의 푹 젖은 오른쪽 어깨도 산에겐 소중한 흔적이었다.

 

 

 

​

 

    “오늘 신문이에요! 어서 가져가세요!”

​

    “신문 2부만 주겠니?”

​

    “여기요. 4프랑입니다!”

​

    “오늘은 특별한 소식이라도 있니?”

​

    “그럼요, 에를리히 발레단의 이브 대신 새로운 프리모가 탄생했잖아요. 산! 이브와 똑같은 나라 사람이라는데 이브와 또 다르게 한 번 보면 헤어 나올 수가 없대요.”

​

    “그렇지, 아주 강렬하고 아름답지.”

​

​

    덥수룩한 수염을 다듬은 쟝이 신문의 첫 페이지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산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멋진 별이 됬구나.

 

 

 

​

 

    “영아, 나 왔어. 뭐 만들고 있던 거야?”

​

    “브리오슈! 이거 집에서도 만들기 쉽다고 하더라고.”

​

    “나 신문에 나온 거는 안 봐줘?”

​

    “이미 본지가 언젠데. 네 사진 잘라서 저기 액자에다 걸어놨거든?”

​

    “오랜만에 발레 한 번 출까?”

​

    “발레 안 한지도 꽤 됐는데. 다 까먹었어.”

​

    “괜찮아, 기억 날거야.”

​

 

    떨떠름해하는 우영을 뒤로 산이 기억 속의 발레를 꺼내었다. 노래도, 관객도 없지만 오직 둘만 알 수 있는 춤을.

 

 

    “뭐야, 최 산. 이거 고백이야?”

 

 

    산의 화려한 프리모 데뷔작이자 관심을 받은 Rendez-vous. 거리의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작품으로 산이 맡은 독무는 발레리노가 발레리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나 여자 파트 모르는데?”

 

 

    조금 우울해진 것 같은 우영의 모습에 와하하 웃어보이는 것도 잠시 산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에 소중히 들고 있는 마들렌 반죽도 옆에 올려놓은 산이 이마를 맞대면 금세 눈을 감은 우영이 샐쭉 웃어보였다. 음악도, 박수도 없지만 둘에겐 최고의 공연이자 무대이니.

 

 

    “이브, 그래서 고백 받아 줄 거야?”

​

    “바보야. 이럴 때는 조용히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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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지 뭐. 사랑해, 우영아.”

​

    “나도, 산아.”

 

 

    눈이 마주치지 않아도 가볍게 웃어 보인 둘은 환상의 무대 위 무용수들처럼 별들의 만남, 그 막을 내리는 듯 했다. 무대의 마지막은 사랑, 행복이라 하지 않은가. 하나의 무대, 두 명의 별이 만든 아름다운 엔딩.

 

    Rendez-v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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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나오는 상황, 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사실과

관계없는 허구이며 기울임체는 프랑스어입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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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를리히 발레단 Rendez-vous

참가 명단.

 

1.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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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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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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