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of lovers
ㅓㅡ
세계의 중심지 미국. 그 안에서도 중심이라 말할 수 있는 뉴욕. 누구나 한 번 쯤은 뉴요커가 되는 상상에 빠지곤 한다. 잘 빠진 수트를 입고 죽이는 스카이라인 뷰를 자랑하는 맨해튼의 고급형 오피스텔에서 빠져나와 붐비는 도로를 거니는, 달콤한 상상. 그 모든 게 현실이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영화와 소설로 만들어진 허구일 뿐이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커피를 사들고 맞은편 건물을 향해 뛰어가는 우영은 뉴요커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머리를 들고 뉴욕까지 와서 이 남자에게 발목을 잡혔는가에 대한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정우영, 열아홉, 수학 천재. 우영의 키워드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공부만 주구장창 해 온 우영은 일곱 살 때 수능 수학 영역을 거뜬히 풀어내며 사람들의 기대를 온몸에 받고 미국으로 떠났다. 넌 제 2의 빌게이츠가 될 거라는 아버지의 말을 맘속 깊이 새기고 유명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에서의 공부도 딱히 어렵지는 않았고, 우영은 모두의 기대대로 천재가 맞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런 천재는 많았다. 할 줄 아는 건 수학밖에 없는 천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쉽게 꺼졌다. 그게 끝이었다. 우영이 바라던 드라마틱한 삶의 전개는 없었다.
우영은 평범했지만 흔하지는 않았다. 매일 같은 깔별 후드 티에 뿔테 안경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녀도 꼭 한 학기에 한 번씩 그의 진가를 알아본 여학생들이 고백을 해 왔다. 그럴 때마다 우영은 미안하다며 고개까지 숙여가며 거절을 했지만 소문은 부풀려져 우영은 싸가지없고 재수없는 수학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한국에서 온 걔로 불렸다. 싸가지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조용했을 뿐이지만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건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았다. 어차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우영은 그냥 그렇게 살았다.
우영의 입에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해졌을 무렵, 할리우드에는 새로운 신예가 나타났다. 연기 천재, 제임스 (캐스팅하는 신인 배우마다 승승장구 한다는 감독이다.) 붐을 탄 행운아. 주변의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스크린에서의 안면을 튼 배우는 여러 아카데미를 휩쓸며 연기 천재다운 행보를 보여 주었다. 사실 신인은 아니었다. 그저 늦게 발견됐을 뿐이었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모두의 입에서 그가 출연한 영화의 배역과 그의 이름이 들려왔지만 우영은 연예인의 ㅇ 자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알지도,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 유일한 친구이자 그 배우의 팬이자 룸메이트인 성화가 그가 참여했다는 유명 영화의 ost를 흥얼거릴 때 목소리에 대해 대충 참견한 정도. 그게 관심의 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영은 열아홉이 됐고, 정들었던 학교를 떠나 인생의 새 막을 열어볼 시기가 됐을 쯤이었다.
"우영! 혹시 내일 시간 있어?"
치어리딩 부장 리사였다. 잔뜩 멋을 부린 금발에 어깨에 닿을 듯한 귀걸이를 착용한 리사와 달리 두꺼운 뿔테안경에 볼 캡까지 눌러쓴 우영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내일 아르바이트가 잡혀 있었는데... 에릭이 갑자기 데이트 약속을 바꿔버려서, 혹시 그거 대신 나가줄 수 있어?"
어느새 리사의 곁에 선 에릭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우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방을 쥔 손이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의 덩치와 눈빛이 주눅이 든 우영은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우영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 잔뜩 말려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럼 네가 나가기로 한 거야? 이제 못 바꿔! 리사가 특유의 하이톤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일 아침 8 시까지 xx 샵으로 가면 돼, 자기야 굿럭!"
"뭐, 잠깐만 샵?"
에릭에게 안겨 복도에서 사라지는 리사를 보며 기껏해야 스타벅스 정도를 생각했던 우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크업, 패션 등에는 전혀 관련이 없을 뿐더러 그런 문외한인 저도 이름을 들으면 알 정도로 큰 샵이었다.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이 다 그곳을 거쳐 완성된다는, 규모가 큰 샵이었다. 이미 오케이 해버린 일을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리자니 리사 옆에 떡하니 서 있는 저보다 두 뼘은 큰 에릭도 무서웠다. 어쩔 수 없이 뭔지도 모를 그 아르바이트의 대타로 우영이 나가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샵을 가기로 했다고? 네가?"
"놀리면 진짜 죽을 각오해라."
"놀린 건 아니고. 근데 너 설마 그러고 갈 거야?"
성화의 앞에 내일 입을 옷을 갖춰 입고 서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서관 가냐? 아무리 유니폼이 있어도 그렇지 넌 옷이 그거 하나야? 후드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성화의 팩트폭력에 눈물이 찔끔 나는 듯했다. 성화는 우영의 옷장을 열어본 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셔츠라고는 체크무늬뿐이었고 그 흔한 재킷 하나 없었다. 깔끔한 우영의 옷장에 한숨을 내쉰 성화가 옆에 있는 자신의 옷장을 열었다. 형이 우리 정우영이 첫 알바 간다는데 빈손일 수가 있나! 정말 주는 것도 아니면서 생색을 낸 성화가 과하게 밝은 노란 니트를 우영의 몸에 댔다. 너 내가 이거 진짜 아끼는 거다.
결국 성화의 노란 니트를 입고 눈에 닿을 듯이 내려온 머리도 대충 잘라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들 첫 출근 보내는 어머니 행세를 한 성화가 눈을 비비며 우영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우리 우영이 잘 다녀와! 더 있다가는 목도리까지 채워줄 것 같은 모양새에 대충 손을 흔든 우영이 빠르게 집을 빠져나왔다.
살짝 걱정은 됐지만 무슨 일이야 있겠냐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걸음을 재촉했다. 약속된 시간인 8 시보다 살짝 일찍 도착하자 우영을 위 아래로 훑더니 눈을 찌푸린 매니저가 빨리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오라며 우영을 떠밀었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틈도 없이 허둥지둥 환복을 하고 나오자 8 시가 살짝 지나 있었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우영이 제게 쥐어지는 커피 잔들을 받았다.
"진한 아메리카노는 에밀리 거고, 시럽 탄 하얀 잔은 초이 거예요."
"네? 아니···."
에밀리는 누구고 초이는 누군데요... 우영이 그들을 모른다는 해명을 하기도 전에 여자는 사라져버렸다. 어쩔 수 없이 잔을 들고 넓은 샵을 헤매던 우영이 지나가던 직원을 잡고 물었다.
"저기 초이가 누구예요?"
"뭐?"
대통령 얼굴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말을 물은 여자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뭔가를 잘못 말했나 싶어 말을 곱씹던 우영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간단하게, 내추럴하게. 무조건 한듯 안 한듯. 저번처럼 새빨간 거 칠하기만 해."
그 초이가... 저 사람? 우영이 뻐끔대며 입모양으로 말하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재수. 여자는 옆 테이블에서 잔 몇 개를 주워들더니 사라졌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화장대에 발을 올려놓고 잡지를 펴 제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부분을 보고 있는 뺀질뺀질한 얼굴이 보였다. 와 씨... 확실히 연예인은 다르네. 기둥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영의 일은 그 잘생긴 얼굴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시럽 두 번 탄 커피를 그 초이에게 갖다 주고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커피를 들고 조심스레 다가가 초이의 발을 밀고 잘 정돈된 테이블에 커피잔을 놓자 초이의 잘 빠진 미간이 좁혀 들어갔다.
"저기."
"네?"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한국인?"
꽤 자연스러운 한국어에 우영이 놀란 듯 그를 응시하자 초이가 가볍게 웃었다. 나, 한국인인데. 여기 일하는 한국인도 있었나?
"아, 그 오늘 알바로 왔는데···."
"여기 알바도 뽑아요?"
눈치를 보던 우영이 제 뒤에 서있던 매니저에게로 눈을 돌리자 싸늘한 시선이 꽂혔다. 잠깐 나 좀 볼까요? 아니, 그게요... 저는 대타로 온 거라 잘 모르는, 어어 잠시만요! 에밀리에게 줄 커피 잔을 잡고 있는 우영의 옷 뒷자락을 끌자 중심을 잃은 우영이 그대로 커피 잔과 함께 바닥으로 넘어졌다.
"헉···."
후두둑이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현실은 와장창이었다. 그것도 바닥이 아닌 포근한 누군가의 품으로, 담겨있던 커피는 옆에 떨어진 고가로 추정되는 시계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리고 그 주인은 참 불행하게도 안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초이라는 타칭 왕재수였다.
"안타깝네."
"네?"
"이번엔 나 좀 볼까요?"
"그래서 대타로 여기를 왔다?"
"네···."
"그러다가 내 셔츠는 커피 바다에, 시계는 망가트리고?"
...
"근데 그걸 물어줄 돈은 없네."
"이, 있어요."
우영이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초이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바라보는 눈길이 묘하게 느리고 노골적이었지만 당황한 우영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참을 제 앞에 고개 숙인 우영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말을 이었다.
"셔츠는 그렇다 치고. 이 시계 얼만 줄 알아요?"
"아뇨···."
"오."
"... 오십?"
"업."
"오백···?"
"업."
"설마 오천?"
우영은 그 자리에서 생전 처음으로 머리가 백지장이 된다는 말에 대한 의미를 경험했다. 기껏 해봐야 몇백 정도 나가겠거니 했던 사치스러운 시계는 한화로 무려 총합 사천팔백오십이만육천구백이원짜리 시계였다. 제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안겨준 리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자기야, 굿럭! 믿지 못하는 우영에게 친히 인터넷 검색까지 거쳐 가격을 확인시켜준 초이가 말했다.
"이걸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죠?"
"그, 제가 학생이라 돈이 많지도 않고 저희 집이 부자도 아니라..."
"그건 당신 사정이구요."
싱긋 웃는 얼굴에 쏙 들어간 보조개까지 재수 없게 잘생겼다. 조금도 깎아주지 않을 듯한 초이의 말에 우영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죄송해요... 엄마 아들 미국까지 와서 빚이나 지고 살게 생겼어요... 결국 간절한 마음에 무릎까지 꿇은 우영이 초이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제발요, 저 가족도 없이 혼자 여기 와서 생활비 말고는 아무것도 없구요, 그리고···."
"돈이 없으면 몸으로 갚아야겠네요."
"··· 네?"
"사지 멀쩡하고, 어리잖아요."
"그게 무슨···."
"일단 벗어요."
단호한 초이의 말에 우영의 손이 자연스레 제 가슴팍을 가렸다. 지, 지금 미성년자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우영이 벌개진 얼굴로 외치자 초이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 계속 이 커피 흐르는 셔츠 입고 있을 순 없을 것 같은데..."
초이의 말에 머쓱하게 가슴팍에 올라가 있던 손을 내렸다.
"그냥 입을 옷 달라고 하면 되지 뭘 그렇게 말씀을···."
“입고 있을 옷 달라고 하면 찾으러 갈 거잖아요. 나 기다리는 건 질색이라···.”
“그럼 제가 빨리,"
"그냥 그거 입고 싶은데. 대충 사이즈도 맞아 보이고."
전혀 아닌데요... 라는 말을 꺼낼 수는 없어 다시 마음 속 깊이 집어넣었다. 결국 제 옷을 초이에게 건낸 우영이 셔츠를 벗어준 터라 조끼만 대충 걸친 채 멀뚱히 초이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불편한 듯 입을 열었다.
”계속 보고 있을 거예요?“
”아, 그, 그 죄송해요 뒤 돌아 있을게요.”
어느새 셔츠를 반쯤 벗은 그가 허겁지겁 뒤도는 우영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 시계 해먹은 사람이 띨띨하기까지 한데 뭐가 좋다고 웃고 있어요... 차마 뱉어낼 수 없는 말을 삼킨 우영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다 입으셨으면 나가봐도 될까요?”
“그 꼴로요?”
아. 그제야 제가 셔츠도 없이 베스트 하나만 덜렁 걸치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난 우영이 팔로 다른 팔을 감쌌다. 그럼 다 입으셨으면 나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옷도 입어야 하고 혼나러도 가야 해서... 우물쭈물 말을 이어가는 우영에 초이의 미간이 다시 한 번 찌푸려졌다.
“우리 계산 안 끝났는데.”
또 다시 멍청한 표정으로 벙쪄있는 우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채간 초이가 빠르게 액정을 두드렸다.
“비밀번호도 좀 설정하고, 여기로 오는 전화는 꼭 받아요.”
“네?"
"돈 갚아야죠, 우영 씨."
제 할 말을 마친 초이가 탈의실을 빠져나가자 우영은 연락처창이 켜진 제 휴대폰을 확인했다.
[최산]
010-1999-0710
그날 그렇게 사고를 친 우영에게 매니저는 별 말이 없었다. 리사는 그날부로 잘렸다는 것과, 초이, 아니 산이 제가 깨먹은 잔과 접시 값을 지불하고 갔다는 것. 그게 끝이었다. 당장이라도 빚 독촉 문자를 날릴 것 같던 산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여상이 팬이라던 배우가 바로 산이라는 거였다.
성화에게 산의 셔츠를 찢어먹고 시계를 못 쓰게 만들었다는 걸 말하면 약 이년은 그 일로 고통받을 것이 뻔했기에 그저 샵에서 그를 만났다고만 전해주자 열심히 먹던 고기를 집은 젓가락을 놓칠 정도로 매우 기뻐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우영의 졸업식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스타벅스에 들러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테이크아웃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히 메뉴판을 응시하던 우영을 에어팟 노이즈 캔슬링을 타고 들어온 벨소리가 흔들어 깨웠다.
[최산]
초이였다. 거의 두달이 다 되어가 우영의 기억에서 사천구백만원짜리 시계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우영이 저를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도 무시하고 밖으로 향했다.
여, 여보세요.
'11 시까지 카라멜 마끼야또 두 잔 사서 와요.'
네? 잠시만···
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뚝 끊어진 휴대폰을 허망하게 바라보다 시간을 확인했다. 10 시 29 분. 30 분 정도 남은 시간에 마음이 급해진 우영이 다시 매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제 커피를 집으며 카운터의 직원에게 말했다.
"그, 뭐냐···. 아메리카노 두 잔 테이크아웃이요!"
제 손에 이미 들린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 잔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본 직원이 우영의 카드를 받아 리더기에 긁었다.
"아! 잠시만요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카라멜 마끼야또요."
"아 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인 우영이 거의 아메리카노 3 잔 값이 빠져나간 제 카드를 공허한 눈으로 응시했다. 이번달 커피는 이게 끝이겠구나. 졸업식이 목전이라 밤샐 일이 없어서 망정이지 시험이 남아있었다면 여상에게 돈을 빌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 감사합니다. 직원이 건낸 테이크아웃 잔을 받아든 우영이 문자 내역을 확인했다.
새로운 문자 0 개
당연히 주소를 문자로 보내겠거니 생각했는데 우영의 계산 오류였다. 제 아메리카노까지 총 세 잔을 손에 든 우영이 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연예인 차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상단바를 내려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시간이 15 분 정도 남아 있었다. 씨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우영의 시야에 저와 초이의 유일한 접점이 걸렸다.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한 우영이 그곳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역시나 목적지는 샵이 맞았다. 고급스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몸을 기대 숨을 고르는 30 초 동안 우영의 머릿속엔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여기가 아니면 어쩌지, 그냥 빚을 늘려먹으려는 속셈이라면 난 어떡하지... 그 많은 잡생각들은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 순간 사라졌다. 저번의 풀세팅과는 다르게 편한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은 산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지 않게 품에 안아온 커피를 꺼내자 얄밉게 제 것 하나만 쏙 빼간 산을 노려보자 그는 보조개가 깊게 들어가게 웃었다.
“잘 찾아왔네요? 늦지도 않았고.”
“할 일만 알려 주시고 장소는 빼먹으시면 어떡,“
"그거까지가 우영 씨 일이에요. 왜요, 천재 소리 듣고 사셨던데."
"설마 제 뒷조사 하셨어요?"
"나랑 함께할 직원인데 그럼. 누군지, 어디 사는지, 경력이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안 그래요? 출생지는 일산, 한국 나이로 스물, 어머니는 보험..."
"아니, 잠시만요."
직원이요? 지난번의 붐비던 샵과는 다르게 산의 옆에서 염색약을 섞고 있는 직원 한 명 빼고는 휑했다. 제 목소리가 샵 전체에 크게 울리자 입을 틀어막은 우영이 다시 한 번 작게 물었다.
“직원... 이요?”
“어머니는 보험일 하시고 아버지는 작게 사업을 하신다···. 형은 대학생이네?”
“저는 그냥 돈 갚으러 온 건데요···.”
“우영 씨가 이 돈을 벌려면 최저시급 받으면서 24시간 쉬지 않고 260일을 일해야 겨우 벌 수 있어요.”
...
“나는 그렇게까지 악덕은 아니라 최저시급은 좀 그렇고... ”
그게 포인트가 아닌 것 같은데요. 24시간 쉬지 않고 260일을 일해야 한다는 말에 순식간에 울상이 된 우영의 눈썹이 축 쳐졌다.
“그치만요 초이... 저는 이제 졸업이고, 또 한국도 가봐야 하고···.”
“그럼 그 전까지 내 옆에 하루 종일 붙어서 갚고 가면 되겠네.”
“그건 그렇지만···.“
"잊었나본데, 지금 갑은 나예요."
"아뇨 잊지는 않았구요···."
"그리고 초이라고 하지 말기. 딱딱한 거 싫어해요."
원래 이런 관계에서는 딱딱함과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맞지만요... 빚이 될 수도 있는 오천을 쥐고 있는 남자에게 감히 말꼬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우영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자 산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나 좀 놀아주다 가요, 그거 한 잔은 우영 씨 거.”
“네에···.“
결국 산에게 붙잡혀 3시간 동안 수다를 떨다 온 우영은 샵을 나오며 진한 현자타임을 느꼈다. 산은 말하기에 재능이 있었다. 한 소재로 말하다 이야기가 고갈될 법하면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초반에는 딱히 제가 필요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말을 토해내며 기분 좋아 보이는 산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에 고인 땀을 닦아내다 보니 점점 산에게 말려들어 제 학교 이야기에 졸업이 언제인지까지 털어놓고 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태어나기를 말 많게 태어났지만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제 본능을 잃어버리고 산 지 오래였다. 말 통하고 주제 통하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더니 막아놓은 댐 터지듯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산보다 더 신나서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제 배경화면에 자리 잡은 어머니의 셀카에 고해성사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기분 나쁘게도 등지고 나오는 노을이 그림처럼 예뻤다.
**
우영의 기분과는 관계없이 아침은 밝았다. 머리맡으로 비추는 햇살에 눈을 뜬 우영이 빠르게 몰려오는 허기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천장을 두어 번 찼는데도 침대 이층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졸업 전 마지막 겨울방학이라 그런지 여상은 아침부터 놀러 나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아침은 혼자 해결해야 했다. 대충 후드에 패딩을 뒤집어 쓴 우영이 마트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자칭 상사라는 이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이런 작은 마트라고는 와본 적도 없을 법한 명품들을 휘감고서, 아침 8 시에, 우연히 자기 직원의 집 앞에 있는 마트를 올 확률이. 산이 저를 정확히 본 게 아니라면 지금 여기서 빨리 도망쳐 나가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지만 산은 그보다 빨랐다. 그가 우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영 씨 여기서 다 보네요."
"아···. 하하하 그러게요."
"아침부터 마트는 무슨 일이에요?"
"그러는 초이, 아니. 산 씨는요?"
"저는 이거."
산이 들고 있던 콜라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건 여기 말고도 충분히 사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을 마음 속 깊이 꾹 눌러 담았다. 네에... 그러시구나... 우영이 사려던 냉동식품을 집어 들자 산이 손을 뻗어 냉동식품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런 거 먹으면 몸에 안 좋아요."
"아 제가 이걸 매일 먹는 건 아니라서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밥 사줄 테니까 갈래요?"
"괜찮···."
그냥 가요. 산의 손목에 걸려있는 새 시계가 번쩍거렸다. 제가 해먹은 시계가 생각난 우영은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냉동 볶음밥을 내려놓았다. 앞서 나가는 우영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산이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산이 뒤를 돌자 장을 보러 나왔던 이들이 그임을 확인하고는 하나둘씩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 진짜 초이야. 그런 그들을 돌아보며 새삼 제 빚쟁이가 스타임을 알 수 있었다.
밖에 나와서도 시선들은 여전했다. 동경의 눈빛으로 산을 보던 시선들은 다시 돌아와 탑배우 초이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걷고 있는 일반인인 우영을 훑고 있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많았다.
아침부터 더부룩하게 레스토랑이라도 가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산이 우영을 이끌고 간 곳은 우영도 자주 다니는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패스트푸드점 하나를 살 수 있을 법한 명품을 휘감고 자율 계산대 앞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는 모습은 어색했지만 그의 손길은 꽤나 능숙했다. 의외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가 가볍게 웃었다. 내가 우영 씨보다 여기 더 많이 다닐 걸요? 난 아침마다 여기서 먹는데.
"아침마다 여기 있으면 파파라치들 안 붙어요?"
"물론 테이크아웃. 여기서 먹는 건 오랜만이에요."
"하긴 그렇겠다. 그럼 차에서 혼자 먹어요?"
"대부분 그렇죠."
"안 외로워요?"
"딱히 그런 생각은 안 드는데."
그렇구나... 하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알아보고 따라다니는데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하겠네요. 제 마음대로 이해한 우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산이 새로 받은 쿠폰과 함께 휴대폰 뒤에 있던 쿠폰들을 꺼내어 잘 정리했다.
"와 잠시만 쿠폰도 써요?"
산이 휴대폰 뒤에 달려있는 지갑에 쿠폰을 구겨 넣었다. 쓸 수 있는 걸 안 쓰면 아깝지. 와... 나빴다. 소상공인들은 뭐 먹고 살라고.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이 소상공인은 아니죠? 그건... 맞죠. 학교의 생활들이나 연예계 이야기 등 서로에 대한 대화들을 나누다 문득 궁금증이 생긴 우영이 산에게 물었다. 그럼 초이는 언제부터 배우 한 거예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던 산이 멈칫했다. 표정이 살짝 굳어진 듯 보였지만 금방 다시 원래 얼굴을 되찾았다. 잠깐 계산을 하는 듯하더니 손가락 다섯 개를 펴보였다.
"다섯···. 열다섯 살?"
"다운."
"··· 다섯 살."
"다섯 사알??"
쇼를 보는 듯한 우영의 반응에 산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 태어나서 연기만 한 거네요! 그럼. 잠깐만, 지금 초이 나이가 스물다섯이니까... 제 나이보다 연기 경력이 길어요! 엄청난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박수까지 치며 신나하는 우영에 산이 물었다. 그럼 우영 씨는 언제부터 수학 했어요? 신나게 떠들던 우영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어... 셈은 진짜 어릴 때부터 했고... 본격적인 수학은 저도 다섯 살... 쯤이요. 아 맞아요. 다섯 살. 와 우리 이런 것도 겹치네요? 또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하는 우영에 산은 본격적으로 턱을 괴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 그래서 미국 왔구나."
"진짜 힘들었어요, 저. 아는 사람 하나도 없고."
"이제 힘들면 나한테 연락해요. 바로 받아줄게."
"그거 진짜로 믿어도 돼요?"
그럼요, 나 거짓말은 안 해요. 왠지 모르게 그 말에 믿음이 갔다.
먹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길었던 패스트푸드점을 나와 산의 차를 타고 집까지 편하게 도착했다. 창문 틈 사이로 인사를 건네고 차에서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우영은 제 방이자 여상의 방에 걸려있는 산의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만 보면 멀게 느껴지는 사람인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햄버거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한국인이라는 공통분모로 친해진 것이었다면 달랐겠지만 그게 아닌 빚으로 엮인 빚쟁이와 철저한 을의 관계인데 그에게는 전혀 갑과 을이라는 벽이 느껴지지 않았다. 산이 왕재수라던 샵 직원의 이야기도 머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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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던 여상은 알바 가는 날인 걸 잊고 있었다는 메시지와 영화 티켓과 함께 아침부터 자취를 감췄다. 우영은 안타깝게도 혼자 쓸쓸히 영화 보는 취미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또 집에 혼자 남게 된 우영은 침대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엔 어떻게 붙였는지 총을 든 산의 모습이 그려진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문득 산의 연기하는 모습이 궁금해진 우영이 여상의 노트북을 가져와 그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넷플릭스에 로그인 했다. 문자 덜렁 보내놓고 바람 맞춘 대가로 노트북 맘대로 쓰는 정도는 애교지. 역시나 시청 중인 콘텐츠 맨 앞은 산이 장식하고 있었다.
산이 열아홉에 찍었다는 그 영화는 온갖 질 낮은 농담과 사랑으로 가득했다. 많은 키스신들 중 가장 빛나는 건 단연코 산과 여주인공의 키스였다. 다정한 눈빛으로 상대 배우를 바라보는 산에 괜히 덩달아 기분이 묘해진 우영이 탁 소리나게 노트북을 닫았다가 조심스레 열어 액정을 확인하고는 다시 천천히 닫았다. 우영은 평소 로맨스 영화는 절대 보지 않는 편이었다. 설레지도 않았고, 결정적으로 판타지보다 더 판타지 같았기 때문에. 정말 잘생긴 사람들과 예쁜 사람들만 나와서 사랑을 나누는 영화는 친구라고는 하나 뿐인 우영에겐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당장 이 영화에서 남주인공 역을 맡았던 이는 당장 전화를 걸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찾아가면 만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천천히 영화를 생각하는데 떠오르는 장면은 산의 키스신 하나뿐이었다.
'사랑해.'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내도 자꾸만 산의 입술과 눈빛이 슬그머니 비집고 올라왔다. 머리를 헤집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잡생각 버리는 데는 커피가 최고지.
매일 입던 후드를 뒤집어쓰고 머리만 대충 빗은 뒤 도둑 차림으로 카페를 찾았다. 문을 당겨 열려는데 안이 깜깜한 게 매우 불안했다. 역시나 있는 힘껏 몸을 부딪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우영은 커피를 마시고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조금 멀리 떨어진 상가에 카페 하나가 있었다. 비싸고 맛도 별로 없지만 커피를 마시기 위해선 선택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또다시 보이는 얼굴에 우영은 황당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이른 시간부터 풀 메이크업에 머리까지 세팅된 산이 손을 흔들었다.
"저 어디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오는 거예요?"
"우연히 여길 들렀는데 우영 씨가 있네요?"
" ··· 여긴 초이 집이랑 굉장히 먼 걸로 알고 있는데요."
산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커피 중 한 잔을 건네며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눌렀다. 이거 마시러 온 거죠? 가요.
산을 따라 차에 타 도착한 곳은 한적한 영화관이었다. 의외의 장소에 우영이 주변을 살피며 눈알을 굴리자 산이 우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요. 보는 사람 없어요, 빌렸어. 그게 훨씬 더 부담되는데요... 축 쳐진 눈으로 앞서가는 산의 뒤를 따라가자 생각보다 작은 상영관이 우영을 반겼다. 뒤를 돌아 다시 생기가 생긴 우영의 눈을 바라본 산이 말을 이었다. 부담 가지지도 말고.
영화는 적당히 재미있었고 시간 때우기는 딱 좋았다.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 영화였다. 여주인공은 학교 퀸카였고 남주인공은 전학 온 평범한 학생이었다. 여주인공역의 배우가 남자에게 왜 그렇게 입고 다니냐 구박하는데 괜히 제 옷이 신경 쓰여 고개가 숙여졌다. 가끔 나오는 클로즈업 신에서 보이는 빛바랜 듯한 색감에 현재 상영 중인 영화가 맞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옆 자리에 앉은 산이 영화에 너무 집중하고 있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다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그제야 말문이 터진 우영이 질문을 쏟아냈다. 이거 언제 영화예요? 저기 나오는 남주인공 요즘 액션영화 나오는 아저씨 맞죠? 이거 오래된 영화예요? 극장을 나가기도 전에 다섯 개도 넘게 질문을 던진 우영이 산의 답변을 기다렸다. 엘리베이터가 다 내려가고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산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우영이 눈치를 살피자 그제야 산이 입을 열었다.
"저거 내 첫 영화예요."
"네?"
그럴 리 없었다. 영화 어디에도 동양인 꼬마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고, 산의 스크린 데뷔작은 로맨스 영화가 아닌 액션 영화였다. 아닌데? 저 아까 넷플릭스에서 초이 데뷔작 포스터 봤어요! 그 대머리 아저씨랑 나오는 거.
"저거 찍기는 찍었는데 나오지는 않더라구요."
"열 네 살 때 제대로 된 배역 맡기 전까지는 자주 그랬어요. 열심히 연기하고, 돈 많은 애들한테 배역 뺏기고."
우영의 입이 굳어버렸다. 지금 가장 잘나가는 배우인 산에게는 무명 시절 따윈 없었을 거라고 너무나 안일하게 생각했다. 눈꼬리가 축 쳐진 채로 산을 바라보자 산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보지는 마요, 지금은 배역 뺏었던 애들보다 잘 나가니까."
"이렇게 보지 말라면서 왜 보여줬어요."
"그냥, 영화가 내 취향이기도 하고. 재미있잖아요. 별로예요?"
"재미있었어요···."
다시 차에 올라탄 우영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겪고가는 루트라고는 들었지만 산이라서 더 다르게 느껴졌다. 항상 빛나게만 보이고 멀게 느껴졌던 산이 진짜 저보다 나이가 좀 많은 또래 친구로 와 닿았다. 산이 핸들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어제 밤에 꿈을 꿨어요."
"엄청 예쁜 보석을 내가 가졌는데, 그걸 아끼려고 책장 뒤에 숨겨뒀거든요."
"근데 그게 먼지들이랑 있으면서 더러워져버렸어요, 되돌릴 수도 없게."
산의 표정을 보려 고개를 돌렸지만 거리의 불빛에 비쳐 잘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도시를 지나 한가로운 주택가에 접어들자 그제야 산의 얼굴이 보였다. 웃고 있었지만 아까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 원래 되게 재수없기로 유명한데 혹시 알아요?"
"아···. 잘 모르겠는데."
샵에서 듣긴 들었지만 제가 겪어본 산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보태어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우영 씨가 보기엔 어떤 것 같아요?"
"그런 사람 같지는 않아요."
"그럼?"
"그냥 빛나는 사람 같아요."
"근데 묘하게 나랑 닮은 사람."
산은 대답이 없었다. 차 안을 맴도는 공기가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옷 끝자락만 매만지던 우영이 분위기를 깨고자 질문을 던졌다.
"근데 꿈 이야기는 왜 하신 거예요?"
그냥 한 말이에요, 흘려들어요. 그 뒤로는 둘 다 말이 없었다. 잘 빠진 세단이 공원 앞에 주차됐다. 잘 가요, 내일은 쉬어요. 우영 씨. 내가 스케줄이 있어서. 그가 간단한 인사를 한 뒤 매끄럽게 공원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우영은 산이 남긴 말들에 생각이 많아졌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평생 공부밖에 모르던 우영이 우연히 샵에 가서 아르바이트 대타를 하고, 또 우연히 그 날 한국 출신 할리우드 탑배우의 시계를 망가트리고, 또 우연히 그 배우는 한국인이었으며, 돈이 아닌 직원이 될 것을 요구했다. 직원이라기엔 하는 일도 없었고, 산과 함께 다니며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은 항상 그가 계산했다. 이런 우연들이 겹쳐 일어나 그를 만나게 된 지 삼 주도 채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 전화번호, 알려지지 않은 본명과 같은 기본적인 요소를 비롯해서 내면의 이야기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대충 산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면서 산의 첫 소속사가 악덕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페이 분배 문제로 이적했고, 지금도 여전히 전 소속사가 말썽이라는 것. 그 소속사와 산의 관계를 더 찾아보다 우영은 속에서 열불이 나는 걸 느끼고 컴퓨터 창을 닫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불행했던 건 산인데 제 가슴이 아팠다. 산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다 알지 못하겠지만 마냥 빛나지만은 않았던 것 같았다.
오랜만의 완전한 휴일이었다. 거의 4주 만에 제대로 된 휴일인데 어제 일 때문인지 이상하게 후련하지가 않았다. 성화도 오늘은 나갈 일이 없는지 방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박성화.“
”는 반말이고.“
”성화 형.“
"왜."
"초이 소식같은 거 없냐?"
"뭔 소식? 영화 개봉···."
"아 그런 거 말고, 좀 개인적인 거."
"아. 뭐 전에 제이랑 사귀었던 거?"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우영이 괜히 성화에게 소리쳤다. 누가 그런 거 알려 달래? 좀 최근 소식, 뭐 있잖아... 오늘 뭘 한다든가...
"아···. 있어! 오늘 아침에 올라왔는데."
"뭐라고?"
"초이 아프대."
"아 그렇구나···."
"응."
"잠시만, 아프다고?“
”응. 아까 쇼 인스타에 올라 왔는데?“
그 뒤로는 어쩌다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스프를 들고 산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우영은 평소 비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성적이고 비이성적이고를 따져볼 시간도 없이 무작정 뛰어 나왔다. 막상 오고 나니 이미 누군가 와 있으면 어쩌지부터 시작해 저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면 어쩌지까지 생각돼 손이 떨어지질 않았다. 초인종을 앞에 두고 몇 번을 망설이는데 제 앞을 가로막고 있던 철문이 덜커덩거리며 열렸다.
"정우영···?"
/
우영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 눈이 내렸다. 오랜만에 보는 눈이라 내일의 토크쇼를 위해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맞고 서 있었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호되게 감기 몸살에 걸려 질 낮은 농담만 오가는 쇼를 피할 수 있게 됐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불참하게 됐다고 분명히 제 인스타에 게시물까지 올렸는데 쇼 공식 인스타그램에 초이는 아파서 참석하지 못한다며 건강상부터 시작하는 장황한 이유를 써내려갔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천만 명에게 어디가 아픈지를 보고하는 기분이었다.
두어 시간쯤 자고 일어나 몸이 편해지니 정우영이 생각났다. 괜히 문자라도 온 거 없나 싶어 휴대폰을 슬쩍 보는데 아프냐며 난리가 난 다른 채팅방과 비교되게 우영과의 채팅방만 고요했다. 원래도 sns를 하지 않는 우영이라 별 기대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우영이 뭐라고 계속 신경이 쓰이지?
당장 제 점 하나만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좋아요를 눌러 주는 사람이 백만은 족히 넘을 것이다. 저의 팬도 아니고, 저를 좋아한다는 보장도 없으며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채무 관계인 정우영의 연락이 제 연락만 기다리고 있는 잘난 배우들의 연락보다 기다려졌다. 저와 5년을 넘게 함께한 매니저에게도 말하지 않은 제 속 이야기를 우영에게는 스스럼없이 쏟아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릿속에 정우영이 가득 찼다. 열과 잡생각으로 머리가 뜨거워 식힐 겸 통유리로 된 유리창에 얼굴을 기대었다.
"미쳤네. 최산···. 헛것도 보이고."
대문 앞에 우영이 아른거렸다. 봉투를 들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우영이었다. 초인종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 내려놓았던 봉투를 집어 들어 집 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와서 또 고민했다. 한참을 기대어 킥킥대며 그 꼴을 바라보는데 10 분이 지나도록 우영은 그대로였다. 눈을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았다. 기대어있던 몸을 일으켜 눈을 비벼도 정우영은 그대로 서있었다. 우영은 진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한 건지 다시 내려두었던 봉투를 집어 들고 있었다. 그걸 보자 일단 당장 잡아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제 몸 상태 생각도 안 하고 눈 쌓인 앞마당을 가로질러 문을 열어 재꼈다.
"정우영···?"
제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정우영이 제 눈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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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아무 확인도 없이 여길 와요?"
"확인을 하려고 그랬는데 택시에 딱 타니까 폰이 없더라구요···."
"우영 씨도 참 대책 없네요. 내가 안 열어주면 어쩌려고."
"그럴 사람 아니잖아요."
우영이 배시시 웃었다. 맞다. 산은 우영에게 그럴 사람이 아니긴 했다. 몸이 아침에 딱 일어났을 때만큼 안 좋았더라도 우영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문을 열어줬을 것이다. 스프 정도는 알아서 떠먹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영은 숟가락으로 뜬 스프를 후후 불어 제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우영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리자 아기에게 떠먹이듯 천천히 입에 넣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데."
"제가 할 거예요."
단호한 우영의 말투에 숟가락으로 향하던 손을 그대로 내렸다. 우영이 떠먹여주는 스프를 먹고 있자니 아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우영아."
"네?"
"우영 씨."
"어, 방금 우영아라고 했죠. 자연스러워서 몰랐네?"
"우영이라고 해도 돼?"
당연하죠, 원래 그게 맞지 않나? 우영이 다시 한 번 스프를 후 불어 산에게 먹였다. 어느새 그릇에 조금 담긴 스프가 반절 이상 사라져 있었다. 곧 노출이 있는 화보 하나가 잡혀 있는 것이 생각났다. 나 그만 먹을래, 우영아.
"어, 왜요? 아직 많이 남았는데..."
"체중 관리."
"아 그거면 인정할게요."
스프 용기의 뚜껑을 닫은 우영이 또다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먹은 그릇들을 정리하려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엉성했다. 그냥... 거기에 둬, 좀 괜찮아지면 치울게. 우영도 이러다간 깨먹을 것 같았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만 먹이고 갈 것 같던 우영은 아예 의자를 끌고 와 산의 옆에 앉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주제를 던져줘도 못 물고 긴장해서 굳어 있었는데 이젠 대답만 해 줘도 알아서 백 마디를 던졌다.
"저 다다음주에 졸업식이에요."
"외부인 받아 주나?"
"받아야 주죠. 그건 왜요?"
"가고 싶어서."
"와, 초이 오면 나 엄청 유명해지겠다."
학교 너드와 그의 졸업식에 나타난 할리우드 탑스타. 가십지에 실릴 만한 내용이었다. 근데 온다고 해도 우리 관계가 성립돼야 하는데, 뭐라고 하고 올 거예요?
"빚쟁이?"
"맞긴 맞네."
우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연스럽게 상체를 산의 침대에 기대자 산이 말했다.
"너 많이 변했다."
"제가요?"
"너 처음 내가 놀아 달라고 불렀을 때 네. 아니오. 두 개만 했잖아."
"그래서 지금은요?"
"말이 많아졌어."
"시끄러워요?"
"아니, 좋아."
좋아. 산의 시선이 우영의 눈동자에 가 머물렀다. 노골적인 시선에 우영이 마주보고 있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왠지 모르게 귓바퀴가 뜨거워지는 느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저 화장실 좀요."
"아 어 그래. 복도 따라가서 오른쪽."
차가운 물로 세수를 몇 번 하고 나니 머릿속이 깨끗해진 느낌이었다. 걸려있는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은 뒤 화장실에서 나왔다.
나오고 나서가 문제였다. 잡생각이랑 같이 위치 감각도 사라져버린 건지, 그냥 단지 집이 많이 넓은 건지 산이 누워있던 방이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서당개 3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우영도 집 돌기 세 번만에 겨우 산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T of lo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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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 저 왔..."
200 평이 넘는 집을 3 바퀴 넘게 돌았더니 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소리 없이 제 가방을 챙긴 우영이 산의 이마에 손을 얹어 전보다 열이 내린 걸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산의 집을 빠져나갔다. 집을 나가는 문도 찾지 못해 헤매다 화분 하나를 깨먹을 뻔했다. 겨우 현관문을 찾아 조용히 빠져나갔다.
사람 몰리는 시간에 지옥의 전철을 타고 집에 도착하니 산에게 문자 몇 통이 와 있었다. 처음 보는 오타 가득한 메시지들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집 잘ㄹ들러갔어?]
[미안냏 정신이 없어서]
[그렇ㅎ게 가는 게 어디 있어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7:28
부재중 전화 2 통
[잘 들어왔어요]
[너무 잘 자고 있어서 그냥 왔어요 미안해요]
[그렇게 억울하면 우리 집 한 번 와요] 10:31
[장난이에요 ㅎㅎ 잘 자요] 10:50
/
그 이후로도 산은 저를 자주 찾았다. 스케줄이 밀렸는데 차에서 심심하다던지, 갑자기 찾아오는 일도 빈번했다. 불러낼 때는 일이라도 시킬 것처럼 간결하고 딱딱하게 말했지만 막상 가고 나면 영화를 본다든지, 수다를 떤다든지,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전형적인 데이트 코스였다. 산과 만날 때마다 묘하게 말려드는 기분이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려던 찰나엔 항상 그의 웃음에 다시 말려 어딘가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제가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할라치면 빤히 따라붙는 시선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했다.
산을 만난 뒤로 19년 인생 동안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외모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머리도 좀 바보 같아 보이고, 옷도 나름 제가 보기엔 예쁘지만 할리우드에서도 손꼽히는 패셔니스타인 산에 비해서는 일반적인 축에도 못 끼는 형편없는 센스였다. 여자애들이 많이 가는 예쁜 미용실에 가서 제 머리를 맡기는 성화를 보며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짓이라 일축했지만 어느새 제가 그 예쁜 미용실의 샤워기 아래 머리를 뉘이고 있었다.
산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산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과연 갑을관계의 직원이 상사에게 느끼는 감정일까, 아니면 단순 우정의 감정일까. 해답은 둘 다 아니었다. 산이 제게 얼굴을 가까이 하면 붉게 달아오르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저와 더 있어주기를 바라며 질투가 났다. 그 잘생긴 웃는 얼굴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여보세요?
'아직 안 자?'
아직 열 시거든요... 내가 애도 아니고.
'언제는 애라서 건드리면 신고한다더니.'
그때는 열아홉살이었구요.
'그럼 이제 건드려도 돼?'
아 장난치지 마요!
산과 붙어있는 시간이 흘러 어느새 졸업을 일주일 앞둔 우영은 1월이 지나 스무 살이 되어 있었다. 산은 저를 불러 만나는 것도 모자라 밤마다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 예쁘더라.'
네? 어떻게···.
'네 친구 인스타 봤어, 셀카 같이 찍은 거. 나랑은 절대 안 찍어주더니···.'
아니 그건 그렇고 이제 제 친구 인스타까지 보는 거예요?
'죽어도 네 건 알려주기 싫다며?'
그래도... 말을 흐린 우영이 침대에서 돌아누웠다. 산에게 저는 인스타를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고 인스타 같은 건 깔아본 적도 없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영화 언제 나와요?
'그거 비밀인데, 알려주면 나 죽어.'
초이를 누가 짤라요? 그 역 초이 아니면 누가 한다고.
'그건 그렇지, 그 역할을 나 아니면 누가 해.'
방금 좀 재수 없었던 거 알죠.
'역에 몰입해서 그래. 얘가 좀 재수 없어.'
아니면서···.
딱히 할 이야기는 없었지만 산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산의 바쁜 시간 안에 제가 존재한다는 게 좋았다.
‘영아 촬영장 구경 한 번 올래?’
제가 가도 돼요?
‘당연하지.’
와 그럼 저 제임스 볼 수 있는 거예요? 싸인 받아야겠다!
‘케빈만 너무 좋아하면 안 데려가고 싶어지는데···.’
아 그게 뭐예요! 아이처럼 반응하는 우영에 산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더 그렇게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로 대화를 이어가다 문득 궁금해진 우영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근데요, 초이. 왜 나예요?
'어?'
그렇잖아요... 초이가 보기에는 이상하지 않아요?
'... 뭐가?'
우영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면서도 되묻는 산에 덤덤하게 말을 내뱉던 우영의 뺨이 붉어졌다.
할리우드에서도 내로라하는 배우고... 돈도 많고, 또... 솔직히 잘생겼고. 초이 좋다는 여배우 많을 것 같은데...
'나 남자 좋아해.'
그건, 뭐 딱히 놀랍지는 않네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 시계는요?
아, 시계. 산은 그깟 시계는 잊고 있었다는 듯 덤덤하게 답했다. 뭐야, 잊고 있었어요? 과격하게 반응하느라 음이탈이 난 우영이 목을 가다듬자 수화기 반대편에서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지 마요...
'시계는 네 맘대로 해.'
네?
'네 맘대로 하라고.'
그게 무슨...
'나 너 좋아해, 우영아.'
네?
‘좋아한다고 너.‘
정적이 이어졌다. 그저 장난으로 넘길 줄 알았던 산은 예상치 못한 답을 내놓았다. 에이, 장난하지 마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장난 아니야, 영아. 낮은 목소리로 고백하는 산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 우영이 간신히 휴대폰을 고쳐잡았다. 자신이 답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산의 정적에 우영이 겨우 입을 달싹였다.
제가 대답해야하는 거죠···.
'굳이 지금 안 해도 돼, 마음 정리되면···.'
... 은 것... 아요.
'어?'
아직 덜 갚은 것 같다구요···.
'그거 긍정이야?'
긍정이고저도그...좋아하는거맞아요지금목소리더못듣겠으니까끊을게요! 말을 속사포처럼 뱉어낸 우영이 전화 끊김 버튼을 마구 눌렀다.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이불에 대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정우영 미쳤지 멘트가 그게 뭐야... 형 얼굴 절대 못 봐! 이불을 마구 차대다 주변을 살피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장난 아니야 영아. ...아 어떡해 녹음할 걸. 산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애먼 이불을 쥐어 뜯는데 휴대폰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는 듣기 좋은 소리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공기가 싸해졌다. 뭉쳐져 있던 이불 더미 사이에서 처량하게 버려져 있는 휴대폰을 조심스레 들었다. 제발 아니기를... 눈을 살짝 떠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정말 불행하게도 휴대폰 상단바의 통화 표시는 아직도 떠 있었다.
초이···.
'응.'
방금 분명히 전화가 끊어졌는데···.
'응, 그랬는데 안 끊어졌네.'
제 목소리가 설마 들리지는 않았겠죠.
'난 멘트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빠르게 머릿속에 집 앞 공원 호수의 온도가 떠올랐다. 지금 들어가면 많이 추울 텐데... 제 주접 아닌 주접들을 산이 모두 들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죽고 싶어졌다. 우영이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자 또다시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뭘 웃어요···.
'나 형이야?'
조용히 해요.
'알겠어.'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서로의 숨소리만 들리던 정적을 깬 건 우영이었다.
초이.
'응, 영아.'
좋아해요.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초이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내가... 특별해진 것 같고 진짜 내가 누군지 알 것 같아요.
'... 나 울어도 돼?'
이런 거에 눈물 쏟지 말구요. 눈물 모았다가 연기할 때 써요.
'이제 충고도 하네.'
하면 안 돼요? 그 배우들은 이런 거 싫어하나?
'네가 하면 다 괜찮아.'
'시간이 늦었네, 너 빨리 자.'
이번엔 진짜로 전화가 끊어졌다. 전화가 끊어지고 홈 화면으로 돌아온 것까지 확인한 우영이 쓰러지듯 자리에 누웠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들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지금 기분으로는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설명을 좀 들어야겠는데."
"아하하 형 나간다며."
"지금 내가 들은 게 다 사실인 거야?"
우영이 슬금슬금 슬리퍼로 발을 옮겼다. 슬리퍼를 발에 끼워넣고 무작정 튀어 나가려는데 목덜미를 붙잡혔다. 정우영 너 지금 이거 해명 안 하면 못 잘 줄 알아라.
결국 성화에게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스토리를 나열하고 납득을 시켜준 뒤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성화는 제 말을 끝까지 믿지 않다가 산이 문자로 보낸 촬영장 사진과 반쯤 나온 셀카 등등을 보고 겨우 이 모든 이야기들을 납득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거짓말쟁이라는 둥 친구를 잘못 뒀다는 둥 소란을 피우려는 걸 겨우 재우고 제 침대로 내려가니 이미 시계는 4 시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다.
/
우영의 감정 선은 항상 단조로웠다. 이건 괜찮다, 이건 별로다. 이건 나쁘지 않다. 세 가지로만 이루어진 삶에서 산의 등장은 꽤나 파격적인 변화였다. 좋아, 좋다. 단순히 좋다의 의미에서 뭘 하고 싶다, 어떻게 원하고 싶다. 구체적인 바람들이 마음 속에 수놓아졌다.
마음을 고백한 뒤 산을 만나는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산이 새로운 영화 촬영을 들어간 것도 있었지만, 제가 피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뒤죽박죽이던 마음을 말하고 나니 제가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진짜가 된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저와 산이 손을 잡고 허그를 하고, 키스를 하고, 한 침대에 누워서... 거기까지 생각한 우영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산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산을 만나지 않아 밖에 나가지 않는 휴일에 빈둥거릴 계획 세우기를 마친 우영이 대충 캘린더 화면을 넘기다 그대로 잠들었다.
"좋은 아침."
눈을 뜨니 산의 얼굴이 보였다. 아... 어제 상상했던 건데... 꿈이구나. 우영이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심심초 쯤 세고 다시 눈을 뜨는데 웃고 있는 산의 얼굴이 보였다.
"왜 안 깨지..."
"꿈이 아니니까."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산의 입술이 제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떨어졌다. 그제야 현실을 자각하고 우영이 파드득 놀라 뒤로 기어갔다.
"뭐, 뭐야 왜 여기 있어요?"
"네가 하도 피하길래 보고 싶어서 왔지."
그리고 네가 언제 한 번 오라며. 싫어? 아뇨... 그 언제가 이렇게 금방 찾아올 줄은 몰랐다. 웃으며 말하는 산에 얼굴이 붉어진 우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잘 때는 하의를 벗고 자는 습관이 있어 허전한 아래에 이불을 덮고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뭘 상상해?"
"네?"
"어제 상상했던 거라며."
"아 그게···."
"나랑 아침부터 한 침대에 누워있는 걸 상상했어?"
산의 말에 우영은 얼굴이 홧홧해지는 걸 느꼈다. 어제 생각했던 것 그대로 이뤄지는 듯한 루트에 위기감을 느낀 우영이 이불을 더 끌어안았다.
그 다음은 뭐였어? 산의 손이 우영의 허리에 와 닿았다. 가까워진 둘이 거리에 우영이 숨을 들이켰다. 다시금 산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았다.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온몸이 잔뜩 긴장해 제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불 끝자락을 잡고 산을 느끼는 것뿐이었다. 산의 손이 허리에 닿았다. 맨 허리를 만지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봐도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산을 쳐다보자 산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하지 말까?"
"다, 다음번에 하면 안 되는 거겠죠···."
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장난해? 날카로운 산의 말투에 주눅이 든 우영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분위기 깨서... 날아올 산의 비난을 기다리는데 날카로운 말 대신 웃음소리가 들렸다. 겨우 고개를 들어 산의 얼굴을 확인하니 보조개가 깊게 들어가게 웃고 있었다. 나 나쁜 사람 아냐, 영아.
"우리가 시간이 지금만 있는 것도 아니고 너 싫다는데 억지로 할 생각 없어."
"초이···."
"너 그리고 언제까지 초이라고 부를 거야?"
"산 씨라고 하기엔 좀 그렇잖아요."
"형이라고 불러. 잘만 하던데."
"그건 초이 없을 때구요···.“
"와, 없을 때는 잘만 하면서 나 있을 땐 못 해?"
"그게 아니라···.“
"내가 이불보다 못한 신세인 줄은 몰랐네."
와 진짜 유치하다. 어 나 원래 유치해. 더 유치해지기 전에 빨리. 아씨 진짜...
그, 아이씨. 형···. 산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제 앞에서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아 좋다 또 해 봐. 형, 산이 형. 산이 우영의 양 볼을 잡고 침대로 엎어졌다. 아, 초이! 아니, 형! 잠시만!
**
산은 한참을 저와 함께 집에서 머무르다 성화가 올 시간 쯤 집으로 돌아갔다. 여상이 집에 온 뒤 이상한 향수 냄새가 난다며 온 집을 뒤져대는 통에 결국 산이 왔다 갔다는 증거를 잡혔다. 우영의 베개에 붙어있는 금색의 머리카락에 빼도 박도 못하게 딱 걸려 버렸다. 여상은 우영을 앉혀두고 한 시간 반가량의 성교육을 마친 뒤에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산이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자 평일에는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우영 또한 졸업 전 마지막으로 학교에 나가는 기간이었기에 서로 바빠 주말을 기약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산의 영화 개봉일과 우영의 졸업식을 이틀 남겨둔 날이자 만나기로 한 주말이 다가왔다.
주말이 다가오기 전부터 우영은 매우 들뜬 상태였다. 오랜만에 산을 보는 것이기도 하고, 서로 마음을 확인한 뒤 날 잡고 보는 첫 데이트이기도 했다. 직전 날은 일찍 자서 얼굴 붓기를 빼야한다며 여상을 붙잡고 그 전 날부터 옷을 골라뒀다.
개운한 몸을 일으키니 오전 10 시였다. 어제 잠든 시간은 저녁 8시쯤이었는데 12 시간이 족히 넘는 시간 동안 자고 일어나니 찌뿌둥한 느낌 하나 없이 말끔했다. 얼굴을 대충 더듬어보니 심한 붓기 없이 완벽했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일어난 우영이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 오피스텔 1701]
여전히 변함없는 딱딱한 문자메시지에 우영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래도 이번엔 산의 집이 아닌 다른 장소였다. 물론 산의 집도 좋았지만 뭔가 진짜 데이트 같은 느낌에 기분이 다시 좋아진 우영이 괜히 설레어 써보지 않았던 향수까지 꺼내 뿌렸다.
휴대폰 내비게이션 어플에 위치를 찍으니 생각보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검색 정보에 함께 신축, 신혼 부부 등이 연관 검색어로 떴다. 연관 검색어에 설렘에 김칫국까지 얹어 마시게 됐다. 여기서 산과 함께 살게 된다면, 여상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당장 짐부터 싸서 옮길 것 같았다. 부푼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에서 내려 찾아가는 내내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피스텔 앞에 거의 도착했는데도 시계는 12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 때 헤어진다고 쳐도 6시간 내지 7시간을 산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우영의 마음을 알아주는지 쾌속이었다. 올라가는 내내 감탄하며 17층에 내리자 고급스러운 복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1호는 맨 끝이었다.
띵동.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바로 열릴 줄 알았던 문은 문고리를 당겨봐도 굳게 닫혀 있었다. 뭐야... 여기가 아닌가? 다시 한 번 휴대폰 속 호수와 제 눈앞에 쓰여 있는 호수를 비교했다. 1701호, 1701호. 맞는데?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굳게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초이···?"
"누구세요?"
방에서 나온 인물은 제가 바라던 산이 아닌 한 여자였다. 그것도, 산과 함께 로맨스 영화를 찍고 대박이 났던 그 여배우였다. 아... 여기... 가 아닌가? 우영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듯 했지만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 제가 잘못 찾아왔나 봐요. 죄송합···."
순간 우영은 제 눈을 의심했다. 고개를 숙였다 다시 들며 현관문을 반쯤 가리고 있는 여자의 뒤로 금발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샤워가운을 대충 걸치고 있는 건 낯설었지만 그 모습이 영락없는 산이었다. 우영이 그를 보고 뒷걸음질 치자 산이 소리쳤다.
"우영아, 잠시만. 내가 설명할게."
"뭘 설명해, 자기야. 이미 기사까지 난 마당에."
자기야? 기사? 우영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여자가 멍하니 산을 바라보고 있는 우영의 눈앞에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사진이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각도로 보나 위치로 보나 사진에 대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곳에 더 있을 필요도 없었다. 기사라도 없었다면, 차라리 기사만 있고 제가 본 이 장면이 없었다면 산의 변명들을 들어보고 믿을 수 있었을 틴데.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만 빠르게 눌렀다. 산에게 꼴사납게 눈물 흘리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진지하게 고민했던 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에게는 그저 잠깐의 요깃거리일 뿐이었을 텐데 주제넘게 동거까지 생각했던 자신이 떠올라 더욱 비참했다. 꼭 제가 둘 사이에 훼방을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에워쌌다. 오랜만에 산의 차 대신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며 한참을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가 저를 좋아할 이유는 없었다. 행복함에 휩싸여 간단한 사실조차 놓치고 있었다. 온 거리에서 산의 이름과 그 여자의 이름이 들렸다. 그 와중에도 저와의 과거가 그의 앞길을 제가 막을까 걱정되는 것이 가장 죽도록 싫었다.
그대로 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산은 우영의 전화만 기다렸다는 듯이 연결음이 한 번 채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우영아 만나서 얘기하자 정말 다 오해...'
다 갚은 것 같아요.
'뭐?'
빚. 이제 다 갚은 것 같아요.
'너 그거 진심이야?'
네. 지금 이렇게 끝나서 너무 후련하고 홀가분해요. 그러니까 이제 연락하지 마세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울면서 잡기라도 할 줄 알았던 걸까, 차가운 그의 반응에 우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집 앞에 우두커니 서서 울고 있는 우영을 쳐다봤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가 설레하며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다 거짓이 된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열쇠를 잡아 집으로 들어가자 성화가 서 있었다. 성화를 보자마자 그대로 현관 앞에 주저앉았다. 성화는 말없이 우영이 등을 다독여줬다.
/
산이라는 존재를 잊어보려고 노력한 지 삼 주가 지났다. 산의 쪽에서는 꾸준히 열애설을 부인했지만 상대 여배우가 너무 강력하게 맞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산의 의견은 묵살되고 둘의 열애설을 축하하는 방향으로 대중의 반응도 흘러갔다.
우영도 산의 주변인에서 대중 중 한 명으로 다시 돌아갔다. 산을 만난 뒤 소홀해졌던 공부를 하고,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학교를 다니며 평소 같은 시간들을 보냈다. 산이 오고 싶어 했던 졸업식을 혼자서 잘 마치고 성화와 함께 우영이 성인이 된 기념으로 입에 대지 않기로 했던 술까지 마셨다.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들어가니 잊었던 기억들이 다시 박차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이상하게도 산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뿐이었다. 첫인상도, 마지막의 그도 나쁜 기억뿐인데 결과적으로 최산이라는 사람을 생각했을 때는 우영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좋은 고등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탓에 미국에서도 꽤 좋은 대학들에 입학할 수 있었기에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끊던 날 성화는 우영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무려 7년을 붙어 살았다. 정을 안 붙이려야 안 붙일 수가 없는 시간이었고, 서로에게 진짜 친구는 서로밖에 없었기에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우영이 형아 없이 어떻게 사냐며 흐르는 눈물을 닦는 성화에 코가 시큼하더니 한동안 멈춰 있었던 눈물이 다시 터졌다. 둘이서 사흘밖에 남지 않은 이별을 아쉬워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지쳐 잠든 성화를 침대에 눕혀놓고 잠이 오지 않아 바람을 쐴 겸 집 앞 공원에 나왔다.
어딜 가나 산의 흔적이 보였다. 좋아한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꽤 오래 전부터 산을 좋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도 다시금 눈가가 붉어졌다. 불이 꺼진 마트 앞 계단에 쪼그려 앉아 공원을 바라봤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오붓하게 거닐고 있는 커플이 보였다. 괜히 울적해져 계단을 툭툭 치고 있는 신발만 바라봤다. 계속 발아래만 내려다보는데 제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올려다 볼 자신이 없어 제 눈앞에 펄럭이는 베이지색 코트만 바라봤다. 익숙한 향과 색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회색 후드 끝자락으로 눈을 벅벅 문지르자 그가 손목을 낚아챘다.
“눈 상해 영아.”
“무슨,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이. “
머리 위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잡혔던 손목이 스르륵 풀려 내려왔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다 갚은 것 같다며. 후련하다며.”
“근데 왜 울어 속상하게···.”
쪼그려 앉아있는 우영에게 손을 내밀자 산을 흘깃 쳐다본 우영이 손을 제 무릎 사이에 더 깊게 넣었다. 나 변명... 들을래요. 이렇게 떠나기엔 너무 억울해서. 내밀었던 손을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은 산이 말없이 우영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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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유년 시절은 불행했다. 아버지는 도박 중독이었고 어머니는 산을 낳자마자 시어머니에게 갓난아기인 산을 떠넘기고 도망가 버렸다. 산의 아버지는 결국 해서는 안 될 짓까지 저질렀고 산과 산의 할머니만 남겨두고 사라졌다. 산의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산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고, 결국 산은 집에서 뛰쳐나와 길거리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만난 게 현재 소속사의 사장이었다. 어린 산의 손을 잡아주고 그의 말을 들어준 건 그 뿐이었다. 그마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지만 산에게는 그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장은 다섯 살이던 산을 친한 감독의 영화에 출연시켰고, 그 대가로 산을 재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줬다. 재워준다 해봤자 차가운 사무실 바닥에 담요 몇 개 던져준 것뿐이었지만 산은 집 안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사장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그 뿐이었다. 머리가 크고 나이가 먹으면서 점점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며 자신에게 더 큰 대가를 요구하는 산에 사장은 도박 쟁이 아버지를 이용해 산을 협박했다. 아직 크지 못한 배우가 사람까지 죽인 아버지가 있는 것을 속이고 나온 것을 대중이 알게 되면 산의 인생은 끝이었다. 학교 하나 제대로 나오지 못해서 연기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소속사를 옮길 수 있는 능력이 되기 전까지는 돈 한 푼 받지 못하며 연기했다. 다행히도 그의 영화를 좋게 본 큰 회사의 사장이 산을 데려가 산을 큰 배우로 키우기 시작했지만 전 사장이 항상 문제였다. 큰돈을 요구하며 산을 방해했다.
가장 큰 문제는 산의 영화가 히트를 친 그 다음부터였다. 산의 이름이 유명해지고 재산이 늘어갈수록 그가 원하는 금액은 점점 커져갔다. 오백만원이었던 금액은 날이 갈수록 배로 불어 지금 찍고 있는 영화를 찍기 전 그는 백만 달러를 불렀다. 편당 사백만 달러 이상을 받는 산에게 그렇게 큰 위협이 될 금액은 아니었지만 산은 더 이상 그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산은 그의 연락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바로 기사를 터트릴 것 같던 사장은 무슨 일에서인지 잠잠했다. 그렇게 영화 촬영은 시작됐고, 산은 우영을 만나게 됐다. 그러던 와중 산의 아버지가 이미 4년 전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8년 전 이미 가족이 아니라고 다짐한 사람이었기에 그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충격은 아니었지만 사장이 그걸 알고도 산에게 돈을 요구했다는 것이 산에게는 충격으로 와 닿았다. 결국 산은 매달 보내던 적은 돈까지 끊으며 그를 완전히 무시했고 자신을 무시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 사장은 산의 행복을 짓밟기 위해 가짜 열애설을 터트렸다. 상대 여배우를 산의 집으로 보내고, 우영과 만나게 만들었다. 이제 산에게 있어서 모든 걸 짓밟은 그는 사람이 아닌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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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이 너무 길지?"
"왜 말 안 했어요."
"내가 이걸 말하면."
“난 네가 말하는 빛나는 사람이 아니잖아.”
“영화 보여준 것도 후회했어. 그냥 말하지 말걸.”
“전 그거 보고 형 더 좋아졌는데요 뭐···.”
“형.”
“응.”
“저 곧 한국 가요.”
“괜찮은 대학 붙었어요. 내 머리가 뭐, 워낙 좋아서.”
농담조의 말에도 산은 웃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어두워진 공원의 하늘만 바라봤다.
“가면 다시는 안 올 거예요.”
그 뒤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깜깜한 공원을 비춰주는 가로등 하나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우영의 회색 후드 위로 하얀 무언가가 떨어졌다. 눈이었다.
“눈 오네···.”
우영이 손을 뻗어 내려오는 하얀 눈을 손으로 잡았다. 가까이 가져와 손바닥을 열어보자 이미 녹아내린 후였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후드에 대충 닦은 우영이 계단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휴대폰을 잡았다.
“저 가볼게요.”
우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앉아있던 계단 위 가로등이 수명이 다 된 듯 깜빡거렸다. 소매를 털고 모자를 다시 뒤집어쓰는 행동이 굼떴다.
“우영아.”
산이 손을 뻗어 우영을 잡았다. 온몸의 열기가 산과 닿아있는 손목으로 쏠린 것 같았다.
“가지 마.”
“가지 마··· 영아.”
내뱉는 말에 감정이 가득 실려 있었다. 닿아있는 손끝이 떨렸다. 뒤돌아 바라본 산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눈앞에서 제가 사랑했던, 어쩌면 지금도 사랑하는 이가 제가 떠나면 당장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떠날 수 있는 냉혈한은 없었다. 적어도, 우영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우영은 산이 하는 변명들이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산을 떠날 수 없었다. 언제인지 모르게 이미 깊이 빠져버린 후였다.
떨리는 눈동자에 우영은 살짝 무릎을 굽혀 산과 마주했다. 처음 보는 절망 가득한 얼굴이었다. 우영이 눈이 내려 엉망이 된 산의 앞머리를 살살 쓸었다. 예쁜 머리 다 망쳤네...
“난 형한테서 못 떠나.”
“나랑 같이 있어 줘요, 계속.”
“나만 봐 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겹쳐 물었다. 따뜻한 온기가 밀려 올라오는 듯했다. 깜빡거리던 가로등도 어느새 제자리를 찾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은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 위로 눈이 떨어졌지만 상관없었다. 눈이 거세져도, 눈보라가 치더라도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이유인 서로가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는 우리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써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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