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산틀막기
뽀득, 뽀드득.
사방으로 빼곡히 늘어선 넓은 갈대밭 위로 하얀 이불이 덮였고 그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발을 꾹꾹 눌러 밟는다. 자주 산책하는 익숙한 장소이지만 밤새 눈이 덮이고 난 이른 아침, 깨끗한 눈밭을 밟는 산은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새하얀 길에 도장을 찍는 제 발등을 쳐다보고 한참을 걷다가, 그 앞에 누군가 저보다 먼저 찍어 놓은 발자국을 발견한 산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다. 갈대밭을 아무렇게나 가로질러 온 발자국이 이제는 산의 발 앞에 삐뚤빼뚤 놓여 있었다. 다시 고개를 떨군 산은 그 발자국 위로 발을 겹쳐 삐뚤빼뚤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빽빽하게 자리 잡고 서 있던 갈대들이 주위로 듬성듬성 흩어질 때쯤 따라 밟던 발자국도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제야 다시 고개를 든 산은 저만치 절벽 너머로 펼쳐진 바다와 절벽 끄트머리에 쪼그려 앉은 남자를 보았다. 그의 주변부터 제가 서 있는 자리까지 정신없게 밟혀 있는 자국들을 보아 그가 그 주인일 거라 짐작한 산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한다. 절벽과 조금 거리를 두어 쪼그려 앉은 그는 새빨간 손으로 눈덩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빨갛게 부어오른 손이 시리지도 않은지 입김 한번 불지 않고 이미 제법 커다란 눈덩이에 눈을 덧붙이고, 다듬는다. 집중한 탓인지 입술이 비쭉, 튀어나왔다. 산은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 적당히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그의 발 옆에는 지금의 것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눈덩이가 놓여 있다. 눈 덮인 바닥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더니 여태 주무르던 눈덩이를 놓고, 발 옆의 작은 눈덩이를 그 위에 얹는다. 잠시 그것을 쳐다보다가, 그제야 고통이 밀려오는 건지 흐으- 차! 손을 허공에 털었다가 입가에 가져가 후, 후우 불었다가 요란이다. 그때 산이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더니 패딩 주머니에서 휴대용 핫팩을 꺼내 내민다. 불쑥 눈앞에 내민 핫팩을 한번, 고개를 들어 제 곁에 서 있는 산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우영이 얼떨결에 핫팩을 건네받는다. 놀라서 살짝 벌어진 통통한 입술에 동그랗게 뜬 큰 눈을 마주한 산이 입술 새로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크루아상 빵 쪼가리를 꺼내 내민다.
“нос.”
우영은 황당했다. 분명 저 혼자였는데, 열중해서 눈사람을 완성하는 사이에 불쑥 나타난 남자가 느닷없이 핫팩을 건넨다. 얼떨결에 받아 들었더니 그다음은 크루아상. 내가 춥고 배고파 보이나. 지금 뭐라는… 코?
“……코?”
생각과 동시에 입 밖으로 튀어 나간 대꾸였다.
“네.”
대꾸만 했을 뿐 뜻을 이해하지 못한 우영이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보다 못한 산이 우영의 옆에 쪼그려 앉더니 눈사람의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크루아상을 가까이 대었다가 다시 우영에게 내민다.
“아, 아아. 눈사람 코.”
그제야 이해한 우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크루아상을 받아 들어 산이 대어본 자리에 살며시 눌러 고정한다. 산을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마주 보고 웃다가 우영이 먼저 말문을 튼다.
“한국 사람이에요?”
“네.”
우영이 몸을 일으켜 손바닥에 입김을 후후 불고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더니 산에게 펴 내민다.
“우영이에요, 정우영.”
“최산입니다.”
따라 일어난 산이 내민 손을 맞잡아 가볍게 흔들고 놓는다.
“고마워요. 손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는데.”
우영이 손에 든 핫팩을 살짝 흔들어 보이고는 슬며시 웃으며 양손으로 꼭 움켜쥔다. 산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려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다시 자리에 웅크려 앉아 바닥을 두리번거린다. 뭐 해요? 곧이어 그 옆에 따라 앉아 저를 쳐다보는 우영에게 바닥에서 주운 작은 돌멩이 두 개를 손바닥 위에 올려 보인다.
“이건 눈?”
“네.”
대답하면 우영이 배시시 웃으며 그 돌멩이를 집어다가 눈사람에게 눈을 만들어 준다. 산은 우영의 웃음이 지금 우영을 비추는 노르스름한 햇살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손끝을 세워 눈사람에 웃는 입 모양을 그리는 우영의 얼굴에 햇살이 내려앉아 은은히 빛을 낸다.
“여기에선 오래 가겠죠?”
그 옆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산이 네, 입술 끝에 매달린 대답을 뱉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만 끄덕인다. 바람이 잠잠하니 먼 파도 소리가 잔잔히 귓가를 두드린다.
“저기, 괜찮으면 나랑 같이 아래로 내려가 볼래요? 파도 소리 가까이 듣고 싶은데.”
“좋죠.”
산이 먼저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자 우영이 뒤따른다.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서 조금 벗어나면 높은 절벽과 절벽 아래 바다를 이어주는 경사진 곶이 있다. 곶의 폭 좁은 비탈길을 따라 왼편에는 절벽이 가까이 있고 오른편에는 갈대와 풀들이 넓게 뒤엉켜 있다. 앞서 걷던 산이 대뜸 몸을 돌려 우영에게 손을 내민다. 불쑥 내민 손에 의아한 우영이 잠시 머뭇거리다 손바닥에 핫팩을 올려놓자 산이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이거 말고, 손.”
손? 엉겁결에 다시 핫팩을 뺏어 든 우영이 두 손을 어쩔 줄 모르고 버벅거리자 산이 다가와 그 엉성한 주먹을 단단하게 붙잡는다.
“길이 좁고, 절벽이고, 미끄럽고, 위험하니까.”
그러곤 다시 돌아서 제 손을 잡아끄는 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왠지 모를 쑥스러움에 입술을 꾹 깨문다. 좁고, 절벽이고, 미끄럽고, 위험하다잖아. 선의를 베푸는 중이잖아.
둘이서 나란히 걷기는 좁은 길에 산이 자연스레 앞섰고 우영이 한 발짝 뒤에 걸었다. 길은 생각보다 완만했지만 눈이 쌓인 탓에 발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긴장한 우영이 주먹을 꽉 움켜쥐자 산이 손을 폈다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다시금 그 주먹을 그러쥔다. 그제야 제 뻐근한 주먹을 의식한 우영이 핫팩을 다른 손에 옮기고서 산의 손을 붙잡는다. 그러면 산은 당연한 듯이 그 손을 맞잡는다. 산은 우영이 밟기 편하도록 바닥을 짓뭉개며 걸었고 한 번씩 우영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란 곶의 반쯤까지 걸어 내려온 두 사람은 바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둘은 아직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였고 그대로 한동안 바다를 응시하다가 우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우리 같은 또래인 것 같은데.”
“우영이라고 부를까? 산이라고 불러 줘.”
“어? 어…… 그래, 산아.”
방금까지 바다를 바라보던 눈을 그대로 저를 응시하는 짙은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싶었다. 산의 눈을 오래 보지 못하고 얼른 바다로 눈을 돌렸다. 불쑥불쑥 잘도 치고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핫팩에, 크루아상에, 불쑥 손잡고, 나이도 모르면서 대뜸 우영이래. 아, 지금 손잡고 있었지. 새삼 맞잡은 손을 의식한 우영이 괜히 머쓱해져 손을 움찔거린다.
손 시려? 산이 잡고 있던 손을 입가에 가져가 우영의 손등에다 입김을 후우, 후 불었다. 남은 손으로 그 손등을 매만지다가 양손으로 꼭 감싸 쥔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산이 저를 돌아보자 급히 고개를 돌린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이 우영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는가 싶더니 우영의 볼에다 입술을 가볍게 맞대고 떨어진다. 놀란 우영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는다. 양 볼에 보조개가 깊게 패었다.
“또 그 눈이다. 놀란 토끼 눈.”
“……읍.”
우영이 딸꾹질을 시작하자 이제는 아예 양손을 들어 입가를 가린 채로 웃는다. 그런 산을 원망스레 째려보던 우영이 뭐가 재미있어! 빽 소리치고는 몸을 돌려 빠르게 비탈을 오른다. 흥분한 우영은 눈 덮인 길이 미끄러운 줄도 모르고 도망치듯 바쁘게 바닥을 찬다. 뒤늦게 우영의 뒤를 졸졸 따르는 산이 그의 뒤통수를 시끄럽게 한다.
“우영, 우영… 우영 씨?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기분 나빴어요? 미안해요, 우영 씨. 길 미끄러운데 위험해요, 응? 우영 씨,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잠깐만, 잠깐 서 봐요. 우영 씨?”
그때쯤 비탈을 다 올라 아까 만든 눈사람 곁에 다다른 우영이 몸을 휙 돌려 산을 무섭게 노려보고 섰다. 멈칫하고 제자리에 우뚝 굳어버린 산이 우영의 얼굴을 살피다가 뭐라 말을 하려 입을 떼는데,
“우영이.”
“…어?”
“우영이라고 부르겠다며.”
“아… 응, 우영아. 미안해, 놀라게 해서.”
우영은 속으로 멈춰 준 딸꾹질에 감사했다.
“빨리 와.”
새침하게 말을 툭 뱉은 우영이 뒤돌아 걸음을 옮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에게 뛰어가 나란히 발을 맞춘 산은 방금 우영이 저를 용서해 준 건지, 뭐라 말을 덧붙여 주길 바라며 그를 쳐다봤지만, 그런 그를 아는 우영은 입술에 힘 꾹 주어 비실비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잡은 채 앞을 보고 걷기만 했다. 산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섬의 끄트머리, 둘이 있던 곳에서 차가 다니는 도로까지 가려면 족히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했다. 걷는 동안 둘은 말이 없었고 눈 밟히는 소리만이 둘 사이의 정적을 채워 주었다. 서로를 의식한 어색함이나 불편함은 없었다. 우영은 잠시 아까의 일들을 회상해 본다. 산은 다정했다. 길이 좁고 미끄럽다며 불과 몇 분 전 첫인사를 나눈 제게 서슴없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을 달래는 듯한 손길에 마음이 동해서 그냥 그 손을 붙잡았다. 그보다 더 단단하게 저를 붙들어 주는 손이 좋았다. 정말 다정한 친구였다. 흙바닥이 보이도록 눈을 헤쳐 놓는 산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그 발자국을 따라서 걸었다. 문득 저를 돌아보는 그에게 자꾸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필요 이상으로, 다정했다. 손이 시리냐며 손등에 입김을 불어 줄 줄이야. 볼에 뽀뽀했을 때, 정말 놀라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다만 제 딸꾹질에 웃음이 터져 버린 그가 얄미웠다. 누구 때문인데? 실컷 다정하게 굴어 놓고서, 제게 뽀뽀까지 해 놓고선 우영 씨라 부르는 목소리가 미웠다. 우영이라 부르겠다면서, 산이라 불러 달라면서? 뽀뽀는 용서가 됐는데 우영 씨는 용서가 안 됐다. 그런 저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갈대밭을 지나자 가지가 앙상한 나무들이 가로수를 이루고 있었다. 문득 바닥에 신발이 아닌 작은 돌멩이로 콩콩 찧어 놓은 듯한 자국들을 발견한 우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여우.”
“응?”
“여우 발자국.”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니 설명을 덧붙인다.
“운 좋으면 가끔 만날 수 있어. 아까 크루아상, 여우 주고 남은 거.”
“…나도 보고 싶다, 여우.”
“다음에 통조림 가지고 오자.”
“응, 그러자.”
그렇게 다시 말문이 트인 두 사람은 걷는 와중 간간이 대화를 나누었다. 산은 이곳에 산책하러 자주 들른다고 했고, 우영은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다. 우영은 근처 대학교에 교환 학생으로 재학 중이라고 했고, 산은 아버지의 보트 운행을 도우며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 너 보트 몰 줄도 알아?”
“응.”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빛내는 우영을 달래 주었다.
“나중에 태워 줄게, 바다에 얼음 좀 녹으면.”
“좋아. 약속했다?”
“응, 응.”
···
“산아, 저기.”
“응?”
“저기, 벙커 건물. 같이 들어가 보면 안 돼? 아까는 새벽이라 어둑해서 못 들어갔는데.”
낮은 언덕 형태의 시멘트 건물 위로 마른 잔디가 덮여 있다. 건물 중앙에서부터 바깥으로 양쪽에 커다란 입구와 그 옆에 입구처럼 보이는 작은 구조물이 좌우로 대칭을 이룬다. 안으로 들어와 보니 두 개의 입구는 벙커의 내부에서 ‘ㅂ’ 모양의 복도로 이어진 구조였다. 우영이 오, 오오… 하는 낮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건물 구석구석을 둘러본다.
“와, 이쪽 입구랑 저쪽 입구랑 통하는 거였네.”
“그러게. 나도 밖에서만 보고 처음 들어와 봤어.”
“여기 재미있다. 무슨 아지트 같아.”
그렇다고 하기엔 매우 커다랗고 개방적인 구조였지만 산은 우영의 말에 전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든 우영이 벽에다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뭐 해? 산이 우영의 뒤에 붙어 서서 목을 쭉 빼고 본다.
산이 一 우영이
一 一
“대충은 알겠는데, 저 작대기는 뭐야?”
“날짜 쓰는 건 식상해. 각자 여기 올 때마다 바를 정자로 표시하자.”
“산이, 우영이 가운데는?”
“그건 혹시 오늘처럼 마주칠 때만.”
···
“너 사는 곳은 어디야?”
“여기서 더 안쪽 마을에. 너는 학교로 돌아가?”
“응, 기숙사 살아서.”
“그러면 버스 타겠네.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
이른 아침에 만나 벌써 대낮이 되어 있었다. 새하얗게 잠들어 있던 배경은 쨍한 햇살에 깨어나 저마다 자신의 색을 찾아 입는 중이었다. 먼 길을 걸어 마침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우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애꿎은 신코를 바닥에 콕콕 찧었고, 산은 손바닥을 비볐다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손을 가만히 두질 못하고 자꾸만 곁눈으로 우영의 눈치를 살폈다.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가 이내 결심한 손을 들어 우영의 뒤통수를 살며시 쓸어내린다.
“우영아.”
“응.”
“우리 또 볼 거잖아.”
“응.”
다정한 손길과 음성에 우영은 코끝이 찡해질 것만 같았다. 결국 그 손을 잡아 내리는데 이번에는 슬그머니 깍지를 껴 온다.
“연락처 안 알려 줄래?”
“…내일.”
“내일?”
“응, 내일. 내일 같은 시간에 만나자. 눈사람 잘 있나 확인해야지.”
“알겠어. 꼭 나와야 된다?”
“그래. 내일 꼭 알려 줄게.”
우영은 산의 손에 이끌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도장, 복사, 코팅까지 해야 했다. 그런데도 안심하지 못하는 눈치인 산이라 버스에 오르기 직전 그의 볼에다 입술 도장까지 찍어 준 뒤 후다닥 버스로 뛰어오른 우영이었다. 놀라기도 잠깐, 버스에 오른 우영을 집요한 눈길로 좇는 산에게 내, 일, 만, 나. 창문 너머로 다시 한 번 약속해 주었다.
산이 일찍부터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였지만 몸과 마음은 오히려 다른 날보다도 개운했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우영은 없었다. 아직 푸르스름한 주변이 어제보다 이른 시간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오는 중이겠거니 생각한 산은 다음으로 눈사람을 찾았다. 표면이 조금 녹긴 했어도 외형은 그대로였다. 애써서 단단히 뭉친 보람이 있네. 어제 눈을 빚던 우영의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외형도, 돌멩이 눈도 그대로인데… 크루아상이 없다. 뭐지. 가까이 들여다보니 크루아상이 있던 자리에 작은 종이 쪼가리가 팔락이고 있었다. 끝을 잡아당기니 종이쪽지가 딸려 나온다. 펼쳐 든 쪽지에는 우영의 것일 연락처와 그 아래에 짤막한 문구가 쓰여 있다. ‘산이 丅 우영이’
벙커로 오라고? 실없이 웃음이 났다. 도대체 언제 와서 이 쪽지를 심어 놓고 숨은 거야. 벙커에 숨어서 그 앞을 지나는 제 모습을 봤을까, 혼자서 어둑한 벙커에 들어가기 겁나진 않았을까. 벙커는 꽤 초입에 있는데, 지금쯤 엄청 춥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산이 쪽지를 다시 접어 손에다 쥐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우영이 보고 싶었다.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꿀떡꿀떡 삼키며 쉬지 않고 달렸다. 드디어 벙커 앞에 다다른 산이 허리를 숙여 무릎을 붙잡고서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안으로 들어선다. 기억하고 있다, 우영이 낙서하던 곳. 벙커 안쪽의 건물을 가로지른 통로. 입구에서 이어진 복도 끝의 모퉁이를 돌자 마주 본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우영과 눈이 마주친다.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복도 끝을 바라보고 있던 우영이 산을 보고 싱긋 웃어 보인다.
“왔어?”
우영에게 뛰다시피 다가간 산이 우영의 어깨를 잡아끌어 제 품에 가둔다.
“보고 싶었어.”
“응, 나도.”
우영이 팔을 올려 산의 허리를 감싼다. 방금까지 찬바람을 맞아 차다 못해 시린 품에 뺨을 기댄다. 산에게서 나는 겨울바람 냄새가 좋다.
“나도 보고 싶었어.”
속삭이듯 작게 대답하자 산이 우영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다. 아직 고르지 못한 숨이 우영을 간지럽힌다.
“나 간지러운데, 산아.”
손을 올려 그의 뒤통수를 조심스레 어루만져 준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산의 눈가에 물기가 어려 있다.
“뭐야. 너 울어?”
“…아니.”
“아닌 게 아닌데? 우는데?”
“아니라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뚝뚝 끊어지는 대답을 한다. 가까이 얼굴을 살피려 하니 고개를 푹 숙여 시선을 피하는 산에 우영의 광대가 한껏 치솟는다. 벙커 안이 어두웠지만 스치듯이 반짝인 눈가를 분명히 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자, 이거.”
우영이 산의 손에 핫팩을 쥐여 준다.
“아, 고마워. 너는?”
“내 것도 있지.”
“으응.”
“그런데 왜 울었어?”
“안 울었어.”
“거짓말.”
“진짜.”
“으응. 그래서 왜?”
“우영아아.”
“알았어어.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춥지. 우영이 산의 얼굴로 손을 뻗는다. 볼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얌전하게 저에게 뺨을 맡기고 있기에 얼굴을 붙잡아 올리려니 힘을 주고 버틴다.
“야아, 나 보고 싶었다며.”
“응….”
“그런데. 안 볼 거야?”
대꾸가 없다.
“산아.”
불렀더니 그제야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러나 여전히 민망한지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쳐다보고 있다. 엄지로 눈가를 쓱, 문질러 닦아 주고 볼을 살살 쓰다듬으니 이내 저를 바라봐 준다.
“좋아서.”
“응?”
“좋아서 그랬어.”
“으응. 알아.”
산이 우영의 손을 잡아 깍지를 낀다.
“너 손 시려. 이제 가자.”
응. 그런데 어디 가? / 음, 밥 먹으러? / 그래. / 아, 잠깐만. / 왜. / 그거, 벽에다 표시해야지. / 내가 이미 했어. 가자. / 내 것도 했어? / 응, 내가 다 했어. / 다음엔 내가 할래. / 다음번엔 네가 다 해. 됐지? 나 배고파, 산아. / 응. 뭐 먹고 싶어?
···
산이 丅 우영이 꺼
丅 丅
Мыс Тобизина, Russky Island, Vladivostok, Russia.


